3-2 Marrickville 커피, 맥주가 있는 낭만의 매릭빌
내 또래 친구들이 놀러 오면 데려갈 동네는 바로 매릭빌(Marrickville)이다. 뭔가 오래되고 지저분한 것 같은 데서 나는 편안함을 느끼고 너무 많이 유명하지 않아서 자발적인 아웃 사이더로 살고 싶은 나에게는 좋은 동네이다. 일단 내가 좋아하는 거 다 있다. 베트남 식당, 스페셜리티 커피, 수제 맥주 양조장 게다가 주차하기 좋고 저렴하고 같이 갈 친구만 있으면 완벽하다.
매릭빌 기차역에서 큰길 일라와라 로드 (Illawarra Rd)를 따라 걸어가면 VN Street food가 있다. 매릭빌은 특히 베트남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인데 베트남 식당, 베트남 과일가게, 베트남 커피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역시 다문화국가 호주는 동네마다 국적별 이민자들이 있는데 예를들어 라이카트(Leichhardt)는 이탈리아, 버우드(Burwood)는 중국, 어번(Auburn)은 중동, 여기는 호주 속의 작은 베트남이다.
이 집에서 분짜를 먹어야 된다. 분짜는 우리 숯볼 돼지고기를 비빔면이나 냉면에 싸 먹는 것이랑 비슷해서 우리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다. 시원하고 달달한 육수에 숯불에 구워 불냄새나는 돼지고기를 촉촉이 적시어 쌀국수 면과 야채, 커리엔더를 같이 젓가락으로 말아서 한입에 넣는다. 담백한 쌀국수와 고기의 오묘한 조화로움, 입 안에 퍼지는 달달한 불맛과 커리엔더의 향이 최고이다. 특히나 하노이처럼 무더운 날이나 입맛 없는 날 분짜 한 그릇 하면 행복해진다. 가격도 저렴하다.
당연히 분짜 말고는 이 동네에는 베트남 바게트인 '반미'와 쌀국수 '퍼'도 있다. 반미는 프랑스 바께트 빵처럼 딱딱한 빵 가운데에 계란 프라이, 말린 돼지고기, 야채를 넣어서 만든 베트남식 서브웨이(Subway)이다. 그리고 '퍼'는 뜨거운 육수에 얇게 썬 소고기가 들어간 쌀국수인데 강한 고수 향이 술 먹고 다음 날에 먹으면 정말 시원하다. 참고로 매릭빌은 베트남중에서도 사이공처럼 남부 사람들이 많고, 하노이의 북부 사람들은 뱅크타운(Bankstown)에 많이 모여 살기 때문에 제대로 된 '퍼'를 먹고 싶으면 뱅크타운의 안 레스토랑이 최고이다.
VN Street Food에서 분짜를 맛있게 먹고 나오면 달달한 베트남 커피집도 있지만 눈감고 지나쳐라. 왜냐하면 매릭빌에는 아주 좋은 스페셜리티 커피들, 수제 맥주들이 20곳 이상 있다. 커피나 수제 맥주가 어느 곳이 최고라고 등수를 매길 수가 없다. 왜냐하면 커피는 어떤 원두로 어떻게 로스팅을 했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니 그때그때 다르고, 맥주 역시 몰트와 발효 상태에 따라서 맛이 달라진다. 그래서 매릭빌은 십 년을 100의 선을 넘기위해 계속 치는 골프처럼 계속 꾸준히 오게 된다.
호주 사람들의 커피 부심은 이탈리아에 뒤지지 않는다. 에스프레소 머신을 개발해서 르네상스처럼 커피 문화를 부흥시킨 이탈리아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호주로 이민을 와서 커피 문화를 전파했다. 게다가 호주의 선진화된 관광산업(Hospitality)과 더불어 음식에 대한 전문성과 열정이 폴 바셋(Paul Bassett) 같은 세계적인 바리스타와 세프를 많이 배출하기도 했다. 그래서 커피의 제왕 스타벅스(Starbuck)도 호주에서는 맥을 못 추린다.
여러 스페셜리티 카페 중에 오늘은 로스트빌(Roastville)로 가보자. 바리스타에게 오늘의 싱글 오리진(Single Origin)이 무엇인지 물어봐서 에티오피아(Ethiopia)라고 하면 핸드드립(Hand Drip)을 시키고 아니면 하우스 블랜딩(House blending)한 롱 블랙(long Black)을 시킨다. 또 테이크아웃(Take out)하지 말고 따뜻하게 데워진 커피잔으로 주문하는 것을 잊지 말자. 적당히 데워진 커피잔을 감싸는 온기가 참 좋다.
2차 세계대전중 이탈리아에 온 미군들은 에스프레소(Espresso)가 너무 써서 항상 물을 태워서 마셨기에 미국인이 먹는 커피라고 해서 아메리카노가 되었다. 호주에는 아메리카노(Americano)가 없다. 대신 에스프레소에 물을 태웠으니 롱 블랙(Long Black), 물을 태우지 않았다면 숏 블랙(Short Black)이다.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용하지 않고 바리스터가 종이 필터에 곱게 간 커피를 직접 뜨거운 물을 부어가면서 뽑기도 하는데 핸드드립(Hand Drip) 또는 푸어오버(Pour Over)라고 부른다. 곱게 간 원두를 종이 필터에 넣어서 주전자의 뜨거운 물을 약간 부으면 신선한 원두들이 부풀어 오른다. 1~2분 뜸을 들인 주전자의 뜨거운 물을 원을 그리며 천천히 부어준다. 원두 가루를 타고 시냇물이 흐르듯 또로록 또록록 커피 소리도 참 좋다.
원두 본연의 캐릭터를 잘 모른다면 원산지별로 싱글 오리진을 마셔보자. 싱글 오리진(Single Origin)은 한 종류의 원두만으로 뽑아낸 것인데 당연히 원두의 맛을 잘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과일처럼 산미가 강해서 상큼한 향이 풍부한 에티오피아(Ethiopia)와 구수한 초코렛향의 풍미가 있는 콜롬비아 (Colombia)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다양한 맛의 원두를 조합하여 새로운 맛을 요리하는 것이 블랜딩인데 카페의 시그니쳐(signature)가 되는 커피가 하우스 브랜딩 (House blending)이다.
커피라는 게 참 재미있다. 사람도 인종마다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데 '그놈이 그놈이야'라고 한다면 원빈도 아저씨이고 나도 아저씨인데 얼마나 다른가? 커피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도 지금의 와이프를 만나기 전에는 김태희가 광고하는 커피, 아님 이나영이 나오는 커피밖에 몰랐다. 그런데 커피 감별사(Cupper)인 아내를 만나서 커피의 다양한 맛과 향 그리고 온도까지 느끼며 잠자고 있던 오감이 살아나게 되었다.
커피는 음료 이상의 가치가 있다. 카페에 들어서는 순간 공간을 가득 채운 구수한 커피 향과 우유를 끓이는 스팀 소리와 경쾌하게 웃으면서 주문을 받는 바리스타들을 보면 새벽시장의 외국 버전 같다. 바리스타에게 오늘의 싱글 오리진을 뭐로 쓰는지 어떤 맛인지 물어보면 대부분의 커피를 좋아하는 바리스타들은 자신과 똑같이 커피를 좋아하는 동지를 만났구나 싶어서 신나서 얘기를 해준다. 그런 친절한 바리스타를 만나면 이름을 물어보고 그 집의 단골이 될 확률이 높을 거 같다. 그리고 상큼한 과일향이나 부드러운 초코 렛향이 입안에 가득해지면 단돈 $4불로 살 수 있는 행복 중에 이것보다 더 큰 게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분짜에 커피까지 마셨다면, 이제 해가 지기 시작하고 바야흐로 술시, 맥주를 마실 시간이다. 매리빌에 창고같이 생긴 건물에 간판도 없고 금, 토, 일 3일 정도만 오픈을 하기 때문에 몰라서 지나칠 수 있는 양조장이 많다. 그래서 매릭빌 가기 전에 검색을 해서 정확히 주소와 영업시간을 확인해야 된다. 몇 군데만 추천을 하면 Willie the boatman, Batch Brewing, Stockade Brew, Grifter가 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시원한 생맥주 한잔을 친구와 한잔하면 치킨이 없는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행복해질 수밖에 없다.
서양인들은 아시안이면 다들 중국사람이냐고 물어보는 경우가 있는데, 참 다른 문화에 관심이 없는 해외여행을 안 해 본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아시안도 크게 한, 중, 일의 동북아시아와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의 동남아시아 그리고 레바논, 시리아의 중동 아시아 인도, 파키스탄, 스리랑카의 서남아시아처럼 얼마나 다양한가? 인종도 종교도 음식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맛도 알아야 맛있다. 그러니 이제 항상 관심을 갖고 그들의 고유한 언어, 음식, 종교에 대해 책을 찾아보고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알기 시작하면 여행의 재미가 더욱 커진다.
이제 어느덧 술시도 끝나고 깜깜해진다면 돌아갈 시간이다. 용의 여의주 닮았다는 베트남 과일가게에서 용과(Dragon fruit), 용의 눈을 닮은 용안, 과일의 여왕 두리안을 챙겨서 돌아가자. 오늘 못 간 베컴이 항상 찾는 커피집과 맥주 양조장이 있을 테니 매릭빌은 또다시 와야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