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이야기, 우울 감정
누구나 혼자여선 안된다.
오전 9시 20분.
매일 전화가 온다.
‘뭐해? 좋은 아침이야~ 좋은 하루 보내’
이런 일상적인 대화다.
코로나 때문에 인도에서 갑자기, 신랑도 없이 귀국한 내가 우울감에 빠질까 봐
걱정인지 매일 같은 시간에 전화한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아침에 눈 뜨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해 휩싸이고
불안 폭풍이 지나가면 우울하다.
이 전화 한 통으로 간신이 삶의 끈을 연결하고 나를 일으킨다.
전화를 끊고 생각한다. 난 늘 우울하고 불안해왔다.
‘코로나 블루’ 그 이전부터 쭉.
열한 살 계집아이는 계획이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우울감은 나를 압도했다.
그 계획은 서른 살이 되면 죽는 것!
힘들다가도 내가 내 생을 계획하고 마감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 홀가분했다.
나의 우울감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싱그런 여름.
푸르다 못해 설익은 11살의 나
그는 나보다 세 살 위 지능이 조금 떨어진 사촌 오빠였다.
그렇다. 나에게도 성추행이라는 사건이 벌어졌다.
부모님은 얼마간의 대가를 받고 바쁜 큰어머님을 대신해 그를 방학 때 돌봤다.
그저 신나게 뛰어노는 것밖에 몰랐던 11살의 나는
여느 날과 똑같이 언니와 그와 셋이 잠이 들었고 새벽 기척에 잠 깨어 실눈을
뜨니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서웠다. 그저 누가 알까 무서웠다.
그것이 그렇게 추악한 일이었는지는 그 당시엔 몰랐다.
첫 생리가 터지고 사춘기가 시작되던 어느 여름.
갑자기 그 사건이 내 머리를 강타했다.
난 성추행을 당했다! 그것도 내 집, 내 방에서..
“야~ 왜 이렇게 샤워를 오래 해.. 빨리 나와”
“알았어. 조.. 금만 기다려”
성추행의 기억은 내 샤워 시간을 길게 만들었다.
기억을 물리적으로 지우고 싶었고 몸 구석구석을 씻고 또 씻었다.
온전히 혼자인 샤워실에서 고통에 몸부림 쳤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내가 말한 후에 겪게 될 일들이 머릿속을 맴돌았고
부모님의 반응, 친척들의 반응이 두려웠다.
나의 사춘기는 그렇게 어둡게 시작됐고 그렇게 시작된 우울감은
44살이 된 지금까지도 낯선 손님처럼 찾아온다.
매일 우울하고 불안했던 건 아니었다.
나는 순간 밀려드는 우울감과 불안감을
엉뚱하게도 ‘서른 생 마감하기’ 전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서 달랬다.
첫째 죽기 전까지 내가 하고 싶은 일 하기
둘째 부모님께 친절한 딸 되기
셋째 열심히 부지런히 연애하기
넷째 하루하루 작은 일에 감사하기
아이러니하게도 우울감을 토대로 작성된 버킷 리스트는
우울감에서 나를 건졌다.
첫 번째 버킷 리스트 덕분에
노래를 곧잘 했던 난 가요제에도 용감하게 나가고
방송작가로도 오랜 시간 동안 일할 수 있었다.
‘쳇 어차피 오래 살 것도 아닌데 그냥 하고 싶은 일이나 맘껏 하자!’는 심정이었다.
두 번째 버킷 리스트는
부모님과의 관계를 매끄럽게 만들었다.
원망보다는 죽기 전에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컸고 나름의 최선으로
부모님께 잘했다.
셋째 버킷리스트는 날 즐겁게 했다.
소개팅을 한해에 여러 번을 했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연애도 충분히 했다.
모두 아련한 추억이다.
넷째 버킷리스트는 나를 작은 일에 감동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오늘 먹고 싶은 자장면을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고 오늘 잡힌 저녁 약속 때문에
하루가 즐거웠다. 이른바 ‘소확행’을 제대로 누릴 수 있었다.
‘인생 뭐 있어? 지금 충실하자’라는 생각이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홀로 울고 있던 11살 꼬마의 결심.
왜 서른 살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서른 살까지는 맘껏 살고 싶다는 소망이
서른 살이 지나 마흔넷까지 살고 있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을 키우고 있는 주부로..
우울 감정은 그냥 생기진 않는다.
인생 어느 지점에서 넘어졌고 상처가 있기에 자라는 감정이다.
누군가가 우울감으로 고통받고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그 우울감에 자신의 인생을 던지는 일은 하지 않기.
고통을 고통으로 끝내지 말고 이기려 노력해보기.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방법 찾기.
그리고 우울감이 조금이라도 덜 자라는 날엔
나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기.
나에게 매일 전화해주는 친한 그 언니처럼..
누구나 혼자여선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