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우울감정 03화

우울 감정 세 번째 이야기

상처 드러내기

by 감정기록자

단풍이 고운 가을.

늦둥이를 신랑에게 맡기고

남동생과 언니가 기다리는 커피숍으로 분주히 향했다.

그날도 늦었다. 아이 키우는 엄마는 매일 지각쟁이다.


가을 추위를 녹이며 커피숍에 마주한 나, 언니, 남동생...

나를 사랑하고 나의 유년기를 아는 사람들..

난 말하기 전부터 울먹였다.

그리고 열한 살의 기억을 고백했다.

“언니... 내가 할 말이 있어...”

“왜?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아니.. 그게 아니고..”

"빨리 얘기해봐... 돈문제야?"

"사실은 내가 열한 살 때 우리 집에서 나쁜 일을 겪었어"

내 손은 바람 끝에 매달린 낙엽보다 더 흔들렸고

남동생과 언니는 분노하고 울어줬다.


이 말을 하기까지 왜 이리 오래 걸렸을까?

마흔이 돼서야 내 피붙이에게 고백할 수 있었다.

이유가 있었다.

가족에게 내 이름이 상처가 되는 게 싫었다.

자랑스러운 딸, 동생, 누나가 되고 싶었다.

무덤까지 가져가야지 했었다. 나만 견디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늦둥이까지 출산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에게 추악한 기억을 준 사람이

내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다.

내 남편의 그에게 웃으며 인사할 수 있다.

평생 나의 중요한 모든 행사에 나타날 수 있다.

심지어 나의 장례식에도...


가족을 위해서라도 고백하고 부탁해야 했다.

“나.. 더 이상 친가 가족들 만나고 싶지 않아.

앞으로 친척들 모임에 나는 빼줘.

부모님께 언니가 대신 이야기해줘”


난 앞으로 잘 나가는 작가 누나가 아닌

불쌍한 누나, 동생으로 기억되겠지.

그리고 부모님께는 가슴 아픈 딸이 되겠지.

내 이름을 떠 올리며 자랑스러워했던 가족들이

이젠 더 이상 나를 예전의 의미로 떠올리지 않겠지.

마음 아팠다. 그들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실이..

사실 늦은 고백이었다.

열한 살 때 했어야 했던 일이었다.

나이 마흔이 돼서야 이일을 고백한 건

내 안에 깊은 상처를 돌보고 살아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상처를 드러내고 그 상처를 돌봐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

후회할 것이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살더라도 그건 거짓이니까..

아무도 몰라도 내가 안다.


아들러의 심리학 책 ‘미움받을 용기’에선

불행의 씨앗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그걸 해결해볼 용기가

부족해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한다.

아기가 첫울음을 내기 위해서 주먹을 불끈 쥐고 태어나는 것처럼

나 또한 주먹을 꼭 쥐고 용기를 내야지

더러운 시간을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도려내야 할 것은 도려내야 하니까.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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