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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획자 이형식 May 10. 2024

문서대화의 심화 작법(1)

장그래처럼 하라


문서대화의 기본 작법을 알았다면

이제 심화 단계로 넘어 갈 준비가 되었다.


장그래처럼 하면 된다.

(맞다. 미생의 장그래다)


심화 단계에서는 질문과 답변의 내러티브 과정에서 상대의 ‘첫번째 질문’을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문서대화에서 ‘첫 질문’은 왜 중요할까? ‘핵심 질문’이기 때문이다. 대화형식의 내러티브 전개를 만드는 ‘첫 단추’인 동시에 해당 사안에 대한 상대방의 현재 인식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황금열쇠‘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문서작성시 어디에나 공식처럼 적용하는 ‘하고 싶은 말이 뭐야?’(what) - 왜 그거 해야 하는데?(why) - 어떻게 할거야?(how)’ 등의 기계적인 질문의 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해당 사안에 대해 상대방이 듣고 싶은 ‘진짜 질문’을 밝혀내는 것이다. ‘진짜 질문’은 상대가 겉으로 표현하는 ‘보이는 질문’이 아니라 속으로 생각하는 ‘보이지 않는 질문’일 수 있다.


그걸 찾아내야 한다.


<미생>은 단순히 웹툰이나 드라마가 아니다. 우리 미생같은 기획자들의 영원한 교과서이자 지침서다. 혹시 ‘장그래가 영업3팀 기획서를 다시 쓴‘ 에피소드를 기억하는가? 장그래와 오차장의 브로맨스가 가장 빛났던 이야기 중 하나인 동시에 기획서의 ‘첫번째 질문’을 파악하는 과정이 흥미롭게 그려진 에피소드였다.


장그래와 오차장의 브로맨스


장그래가 속해있는 영업3팀 내 비리직원 내부고발로 중단된 ‘요르단 중고차 수출 사업 재개’를 위한 임원단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 사업 기획서였다. 영업3팀 김대리와 천과장은 일을 깔끔하게 잘 하는 편이다. 역시나 기획서도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게 썼다.


환경분석 - 사업성 검토 - 사업 국가 환경 및 시장분석 - 스왓 분석 - 실행 방법 - 기대효과


그런데 완성된 기획서를 보고 머리에 피도 안마른 신입사원 장그래의 표정이 좋지 않다. 선배들의 기획서가 분명 흠잡을 곳 없이 깔끔하긴 한데 그럼에도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계속 똥씹은 표정으로 일관하는 장그래의 반응에 기분이 좋을 리 없는 김대리와 천과장은 이유가 뭐냐고 다그쳤다.


“왠지 우리 기획서가 매뉴얼보다 더 매뉴얼 같아서요.”

장그래가 명언를 날린다.


“뭐가 문제야? 매뉴얼 같다는 건 완벽하단 소리쟎아?” 김대리와 천과장은 불편해한다.


그런데 오차장만은 다르다. “계속 말해봐. 나도 뭔가 내내 찝찝했어.”


“매뉴얼대로 쓰니…그냥 우리 사업에 대해 변명과 해명만 하는 것 처럼…느껴집니다.“

장그래는 조심스럽게 토로한다.


장그래, 김대리가 쓴  매뉴얼 기획서를 비판하다
자존심 스크래치. 빡친 김대리


오차장은 그래의 찜찜함에 동의했다. 김대리와 천과장은 내용 구성을 바꾸겠다는 오차장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김대리는 검증되지도 않은 판을 끌고 들어올 만큼 문제가 있진 않다고 강력하게 반박했다. 오차장은 지난 보고서를 정리하라고 그래를 회의실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김대리와 천과장에게 말한다. 기획서 다시 쓰자고. 반대를 무릅쓰고 오차장은 결행했다.


어떤 이들에겐 문제 없는 기획서다. 어떤 이들에게는 문제 있는 기획서로 보인다. 무슨 차이였을까?


기획서를 ’매뉴얼로 쓰는 방식‘과 ’대화형식으로 쓰는 방식‘의 차이다. 일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다.


매뉴얼대로 쓴 기획서는 일단 문제없어 보인다. 정석대로 썼기에 완벽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문서대화의 상대이자 의사결정 청중 입장에서 보면 명쾌하지 않은 기획서다. 장그래는 청중의 입장에서 그게 내내 찜찜하고 부족해 보였던 것이다. 그 고민을 타파할 단초를 발견하는 장그래의 장면(scene)이 다소 만화적으로 느껴지긴 했지만 원래 만화니까 인상적이었다.


우연히 장그래가 회의실 벽에 붙어 있는 세계지도를 천천히 고개를 꺾어 쳐다봤다. 물구나무를 서서 지도를 보자 전혀 다른 그림이 눈앞에 펼쳐졌다.


거꾸로 지도를 보고있는 장그래

똑바로 본 지도에서 남반구에 있는 호주는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데 거꾸로 본 지도에서는 호주가 세상의 중심인 것 처럼 부각되어 보인 것이다.

유레카!! 장그래는 그제서야 왜 선배들의 기획서에서 사업에 마이너스 요소가 부각되는 느낌을 받았는지 알게 되었다. 같은 내용도 형식에 따라 상대방은 다르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형식이란 정해진 매뉴얼의 방식이 아닌 상대의 ‘진짜 질문’에 답변하는 대화형식이란 것을 온몸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만약 청중이 우리에게 하는 핵심 질문이 “어떤 사업이야?”, “왜 그 사업을 해야하지?“, “어떻게 할 건데?”와 같은 ‘기계적인’ 질문이었다면, 김대리가 쓴 기획서대로 “환경분석 - 사업성 검토 - 사업 국가 환경 및 시장분석 - 스왓 분석 - 실행 방법 - 기대효과”로 ‘기계적으로’ 답변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의사결정 청중이 영업3팀에게 묻는 진짜 질문은 그게 아니었다. 기획자 장그래가 찾은 상대방 마음속의 진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질문)
영업3팀 너네가 무슨 면목으로 그 사업이야기를 다시 꺼낸다 말이냐?
낯짝도 두껍지. 동료 팔아먹으면서 그 공을 그렇게도 빼앗아 오고 싶냐?

나이브하지만 명확하다. 팔딱 팔딱 살아 움직이는 상대의 진짜 질문을 찾았다. “비리로 판명난 이 사업을 하겠다고? 니들이 그러고도 상사맨이냐?” 장그래는 청중이 이렇게 묻고 있다고 보았다.


이 질문이 맞다면, 답변은 “환경분석 - 사업성 검토 - 사업 국가 환경 및 시장분석 - 스왓 분석 - 실행 방법 - 기대효과”가 될 수 없다. 동문서답이다. 그래서 장그래는 내내 이 매뉴얼같은 기획서가 찜찜하고 불편했던 것이다. 이제 맞는 질문(Right Question)을 찾았으니 맞는 답변(Right Answer)이 나올 수 있다. 상식이다. 답변의 내용이 달라진다. 기획서의 구성이 달라진다.


오차장의 지시로 영업3팀은 예전에 비리로 인해 우리가 포기했던 사업, 경쟁사들이 재개해서 이익 본 케이스를 싹 조사했다. 기획서 장표로 만들었다. 과감하게 맨 앞장에 배치했다. 첫 질문에 대한 첫 답변인 것이다.


답변)
그동안 비리 문제로 우리가 포기한 사업들은 현재 경쟁사들이 가져가 큰 이익을 보고 있습니다.
죄를 처벌했으니 그 일은 잊혀져야 맞습니까? 저희는 죄만 들어내기로 했습니다.

파격이었다. 매뉴얼과 달랐기에. 이런 (대화형식의) 기획서는 쓰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한번도 보지 못한 형식이기에. 모두 노심초사했다. 기획서의 시작은 언제나 ‘환경 분석’이나 ‘기획 배경’ 부터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비리 사업 성공 사례들‘을 맨 앞에 떡 하니 보여준 문서 구성은 충격과 논란이 일 게 뻔했다.


드디어 사장과 임원단을 모신 프리젠테이션 당일, 오상식 차장은 기획서대로 ‘다양한 비리 사례’를 가장 먼저 언급했다. 예상대로 매뉴얼 기획서에 익숙한 임원들은 예상치 못한 파격적인 기획서의 방식에 크게 동요하고 분노하기 시작했다. 이어 오차장은 비리가 발생한 뒤 중단된 사업 아이템들이 타 기업에서 성공한 사례들에 대해 거침없이 설명한다.


오차장, 파격 기획서로 프리젠테이션하다
비리사업 성공 사례로 발표를 시작하는 오차장
파격에 반발하는 청중 임원단


청중의 반발은 더욱 커졌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분노는 동조와 수긍으로 점점 바뀌게 된다. 급기야 현장은 상사맨의 긍지와 자부심이 넘쳐나는 감동의 도가니탕이 되고 프리젠테이션이 끝날 즈음엔 박수까지 터져 나오게 된다. 그리고 최종 의사결정자인 사장은 영업3팀의 ‘요르단 중고차 사업’을 흔쾌히 승인한다. 도저히 불가능해보였던 프리젠테이션이 성공한 것이다.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까?


철저한 시장조사, 정확한 근거 데이터, 문서 필력, PT 스킬 등등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핵심은 청중의 마음속 진짜 질문을 찾아 정확한 답변을 했기 때문이다.


문) “비리로 판명난 이 사업을 하겠다고? 니들이 그러고도 상사맨이냐?”라고 묻는 청중 임원단에게,


답) “죄는 들어내고 이익만 살리겠습니다. 그게 상사맨의 자세입니다.”라고 답한 것이다.


요르단 사업을 흔쾌히 승인한 사장
“간만에 상사맨의 기백을 느꼈던 PT였어.”


단순히 답변만 잘 한게 아니다. 판을 뒤집은 것이다. 청중들의 인식 상에 있는 ‘요르단 사업 = 비리이슈로 불안정한 사업’이라는 프레임‘요르단 사업 = 이익이 큰 사업’이라는 프레임으로 바꿔버렸다. ‘비리 사업은 버리는 게  상사맨’이라는 프레임을 ‘일의 본질만 보는 것이 상사맨’의 프레임으로 전환하여 청중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PT가 성공하니 심기불편한 1인


설득이란 곧 상대의 현재 프레임을 나에게 유리한 프레임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이른바 프레임 전쟁. 어떻게 하면 내가 주도하는 프레임으로 상대를 초대할 수 있을까의 문제다. 질문은 곧 프레임이다. 답변도 역시 프레임이다. 그래서 프레이밍(framing)은 문서대화 설계의 심화 작법이 된다.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기획서를 써야 하는가.

먼저 상대가 당신에게 궁금한 첫번째 질문을 찾아라.

뻔하고 기계적인 질문 말고,

상대의 마음속 진짜 질문을 밝혀내라.

그리고 답하라.


장그래처럼 하면 된다.






* 문서대화의 기본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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