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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사라 Feb 10. 2021

함께 있으되 거리를 두라

《엄마의 오묘한 심리학》독서에세이 

함께 있으되 거리를 두라.

둘의 친밀함에 공간을 두어,

하늘의 바람이 둘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하지만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오히려 두 영혼의 해변 사이를 오가는 바다를 두어라.    

서로의 잔을 채우되 한쪽의 잔만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 먹지는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각자 홀로 있게 하라. 

현악기의 현들이 한 음악에서 떨지라도 홀로 있듯이.    


마음을 주되, 서로의 마음에 묶어두지 말라.

생명의 손만이 마음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서 있으되 너무 가까이하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은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에서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 칼릴 지브란  ] 




칼릴 지브란의 ‘함께 있으되 거리를 두라’라는 시를 좋아한다.     


‘서로 사랑하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함께 서 있으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는 대목을 기억하며 사랑에 적용하려고 애쓴다. 어릴 적부터 가족일수록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구속하려는 것에 답답함을 느끼곤 했다. 가족이라는 끈끈함이 너무 가까워 서로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을 조심하려고 했다.     


《엄마의 오묘한 심리학》의 저자인 김소희 작가는 배우자와 자녀를 손님처럼 대하면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다 권한다. 특히 부모의 소유물처럼 인식하기 쉬운 자식을 ‘나와 인연이 깊은 남’으로 정의하면 좋다고 이야기한다. 서로 부담이 되지 않으면서 함께 사이좋게 살아가야 하는 남이 자식이라는 것이다. 깊은 공감이 되었던 조언이었다.     


엄마가 처음이라서, 아이를 나의 부산물로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다움을 존중하지 못하고 내가 원하고 꿈꾸는 아이가 되기를 기대했었다. 첫아들에게 불같은 분노가 솟아올랐던 이유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 때문이었다.    


아이는 엄마인 나를 통해 태어났으나 내가 아니다. 

나는 부모님을 통해 태어났으나 나 역시 부모님과 다르다. 

부모는 자녀에게 그저 통로가 되어줄 뿐이다.     

부모와 자녀는 인연이 깊은 남이다. 

자녀는 부모에게 가장 귀한 인연이 되는 손님이다.

서로 짐이나 부담이 되지 않게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엄마의 오묘한 심리학》


엄마가 주고 싶은 사랑, 아내로서 주고 싶은 사랑이 아니라 자녀가 원하는 사랑, 남편이 필요로 하는 사랑을 주어야 한다는 김소희 작가의 권면이 깊이 공감되고 반가웠다.  



    

     

영화보기를 좋아한다. 


가장 여러 번 봤던, 세 번을 관람했던 영화가 〈사도〉였다. 영화를 세 번 반복해 보면서 같은 장면을 볼 때마다 눈물이 매번 쏟아졌다. 영조가 뒤주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확인하면서 통곡했던 대목이었다. 영조의 통곡을 볼 때마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소낙비처럼 흘러내렸다.  

  

영조의 마음이 이해되었고, 사도세자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과한 기대와 사랑이 사도세자에게 사랑받지 못함으로 전달되었을 뿐이다. 영조는 아버지로서 사도세자를 사랑했다. 그 사랑이 사도세자가 받고 싶어 하는 사랑의 모습이 아니었을 뿐이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와 인정과 칭찬을 기대했다. 

사도세자가 정의하는 사랑은 따뜻한 말과 존중이었다.     

영조가 정의하는 사랑은 자신보다 더 훌륭한 왕으로 대접받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유약한 세자에게 차가운 시선으로 냉정한 책망과 훈계를 따끔하게 하는 것이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모습을 영화 속에서 보는 내내 부모님이 떠오르고 아들도 생각이 났다. 폭풍 오열이 반복되었던 이유가 부모님과 아들의 모습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사랑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지 못했고, 나의 사랑도 아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전달되지 못했음을 영조와 사도세자의 모습을 통해 발견한 것이다.     

영조의 사랑이 제대로 표현되지 못해 사도세자의 마음은 병이 들었다. 영조는 손자라도 지켜내기 위해 사도세자의 죽음을 허락해야 하는 잔인한 아버지가 되었다. 사도세자의 죽음 앞에 무너지는 영조의 슬픈 탄식이 내 마음에도 쓰나미가 되어 눈물로 쏟아졌다.    


사랑은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사랑이 된다. 

영조처럼 사도세자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은 상대의 찌르는 무기가 될 수 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성장하면서 버림받은 아이라고 나 자신을 정의할 만큼 부모님의 사랑이 나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결혼해 엄마가 되어 부모님을 되돌아보니 부모님은 나를 이 세상 무엇보다 누구보다 많이 사랑하셨다. 단지 그 사랑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전달되지 않아 사랑으로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다.     


부모라면 아이에게 최고로 좋은 것만 주고 싶다. 

영조도 사도세자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했다.     


왕 다운 왕으로 사도세자가 준비되는 것, 신하들에게 인정받는 왕으로 아들이 세워지도록 영조는 거침없는 훈계를 주었다. 최고로 좋은 것을 주고 싶었던 영조의 사랑은 사도세자에게 마음의 병을 안겨주었고 버림받은 존재로 자신을 정의하게 했다.     

영조의 사랑이 너무 지나치게 뜨거웠다. 너무 뜨거운 사랑은 상대에게 상처가 된다. 사랑할수록 지나치게 뜨겁지 않은 온도 조절이 필요하다. 사랑에도 적절한 안전거리가 필요하다. 내가 원하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에 귀 기울여야 한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모습을 어린 정조가 지켜봤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은 정조에게 트라우마가 되고도 남을 일이다. 결론적으로 사도세자보다 정조가 정신적으로 분열되어야 한다. 하지만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와 같은 길을 걷지 않는다. 할아버지 영조보다 더 훌륭한 업적을 쌓는 칭찬받는 왕으로 건강하게 성장한다.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처를 더 크게 받았다. 


정조는 왜 사도세자처럼 무너지지 않았을까? 


답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 씨였다. 그녀는 상처 받은 아들 정조를 따뜻한 눈길로 지켜봐 주고 정조를 존중해 주었다. 지혜로운 어머니 혜경궁 홍 씨가 정조를 지켜주는 닻이 되었다. 아들을 지켜내기 위해서 남편을 내려놓는 단호한 용기를 발휘했다. 정조가 흔들리지 않도록 혜경궁 홍 씨는 언제나 따뜻한 지지자가 되어주었다. 


반면 연약한 사도세자에게는 흔들릴 때 따뜻하게 지켜봐 주는 한 사람이 없었다. 따뜻한 지지자가 없었던 사도세자는 휘몰아치는 태풍에 좌초되는 인생이 되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느냐보다 닻이 되어주는 따뜻한 지지자의 존재가 왕의 미래를 좌우했다.     


사랑할수록 함께 있으되, 친밀함에 공간을 두어야 한다. 

서로 사랑하되, 사랑으로 서로를 구속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을 주되, 서로의 마음을 묶어두지는 말아야 한다. 

함께 서 있으되, 그늘에 닿을 만큼 너무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    


최고의 사랑은 상대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상대가 원하는 사랑의 모습으로 전달되어야 사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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