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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서하 May 22. 2024

세잔과 용석, 그리고 '세 잔의 차' 미당과 패러디

세잔과 용석


.                         /박지일



세잔의 몸은 기록 없는 전쟁사였다

나는 용석을 기록하며 그것을 알게 되었다


세잔과 용석은 호명하는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

하나의 인물이었다


나는 세잔을 찾아서 용석의 현관문을 두들기기도 하고 반대로 용석을 찾아서 세잔의 현관문을 두들기기도 했다


용석은 빌딩과 빌딩의 높이를 가늠하는 아이였고

세잔은 빌딩과 빌딩의 틈새를 가늠하는 아이였다


세잔과 용석 몰래 말하려는 바람에 서두가 이렇게 길어졌다

(세잔과 용석은 사실 둘이다)


다시,


세잔의 몸은 기록 없는 전쟁사였다

나는 세잔과 용석을 기록하며 그것을 모르게 되었다


세잔은 새총에 장전된 돌멩이였다

세잔은 숲의 모든 나무를 끌어안아 본 재였다

세잔은 공기의 얼굴 뒤에 숨어있는 프리즘이었다


용석아


네게서 세잔에게로 너희에게서 내게로

전쟁이 유예되고 있다


용석아

네 얼굴로 탄환이 쏘아진다 내 배후는 화약 냄새가 가득하다


세잔과 용석은 새들의 일회성 날갯짓, 접히는

세잔과 용석은 수도꼭지를 타고 흐르는 물의 미래, 버려지는

세잔과 용석은 공중의 양쪽 귀에 걸어준 하얀 마스크, 아무도 모르는


나는 누구를 위해 세잔을 기록하나

용석을 기록하나


도시의 모든 굴뚝에서


세잔과 용석이 솟아난다 수증기처럼 함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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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시가 이래도 되는구나. 이렇게 써도 시가 되는구나, 생각하였다. 

세잔과 용석은 보이는 모든 것의 이름으로 바꾸어도 되었으며 만나는 모든 사람의 이름으로 바꾸어도 되었기 때문이다. 


시인이 무엇을 보고 느끼며, 무엇을 의도하였든 그것은 시와 별개이다. 

시는 시인을 떠나서 혼자서 떠도는 우주선인 것이다.


미당과 김동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김동리가 술에 취해 자작시를 읊었다.


"벙어리도 꽃이 피면 운다."

너무나 참신한 표현에 미당은 몇 번을 읊으면서 감탄을 하였고

김동리를 시인으로 인정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미당이 읊는 소리를 듣던 김동리가 손사래를 치며


"아이라, 그기 아인기라.

'벙어리도 꽃이 피면'이 아이라 '꼬집히면'인기라.

벙어리도 꼬집히면 운다."


그 소리를 들은 미당은 "됐네, 이 사람아!" 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 이야기로 나는 한참을 웃었다.

미당의 말대로 벙어리와 꽃과의 무언의 교감은 경탄할 만하다.


그러나 꼬집히면 운다는 뻔한 사실은 그저 진실에 불과한 것이다.

자기식대로 해석은 곧잘 함정이 된다.

진실이 가려지는 것이다.

그러니 시는 적어도 시 안에 시인의 진실을 던져두어야 한다고 나는 믿었었다.


진실과 사실은 다르지? 아마도? 


세잔이 누구인가?

용석은 누구인가?

이런 원론적인 것을 물어보았자 건질 것이 없다.

기록하거나 기록하지 않거나 결국 모르게 되거나 같은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도 네이버에 세잔을 검색하였더니. 어이없게도 ‘세 잔의 차’가 검색되었다. 읽었던 책이다.

세잔은 세 잔의 차? 그거였던 거야? 그럴 리가


<세잔의 차>는 표지에 ‘세 명의 어린이’ 사진이 있다.

줄거리는 생략하겠다. 책에 있는 말이다.


한 잔의 차를 함께 마시면 당신은 이방인이다.

두 잔의 차를 함께 마시면 당신은 손님이다.

그리고 세 잔의 차를 함께 마시면 당신은 가족이다.


박지일의 <세잔과 용석>의 일부이다.


세잔은 새총에 장전된 돌멩이였다

세잔은 숲의 모든 나무를 끌어안아 본 재였다

세잔은 공기의 얼굴 뒤에 숨어있는 프리즘이었다


세잔을 해석해 본다. 세잔은 돌이며 재이며 공기이다. 그것은 결국 지구의 모든 사람의 나노 입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용석은 세잔이었다가 나 자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용석은 누구인가?

용석은 상이군인이었으며 전쟁영웅이었으며 적군이었으며 적십자 회원이었으며 나의 아버지였다가 지금은 남편이고 전생에 있어서는 아들이었다. 그는 한때 가난한 난민이었고 다시 돌아와 무직과 가난에 시달리는 파업 노동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세상의 모든 시는 나를 향한 고백이다.라고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자기의 시선과 경험 안에서 세상은 굴절되어 들어오는 법이다.

 생각했다.

흥분하고 설레었던 진실이 사실은 사실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내가 가진 관념만큼 그대를 해석하고 또 다른 형상을 만들어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꼬집히면"을 "꽃이 피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의도된 오류로 시를 집도한 시인에게 찬양을 보낼 수밖에 없는 나의 미성숙


다시 <세 잔의 차>에 나오는 말이다.


“어째서 그리 쓸데없이 머리를 혹사시켜 미래를 점치려 하는가. 근심을 벗어던지고 알라의 계획은 알라에게 맡겨라, 알라는 내게 묻지 않고 이미 모든 계획을 세워 두셨느니라.”


어쨌거나 내 쪼대로 시를 패러디를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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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국과 거시기 

                             / 오서하


김 씨의 아들 치국은 날 때부터 치국이고 

나는 김 씨 성을 기록하면서 이름이 사라진 것을 몰랐다

치국을 호명하면 치국 아닌 것이 벌떡 일어서곤 했다

치국과 그것 아닌 저것은 거시기

하나의 엿가락이다


먹어라!


나는 치국 아닌 것에서 치국처럼 딸꾹질을 하고 반대로 그가 잃어버린 성에 대해서

침묵을 지켜주었다


치국은 치우기를 좋아했고 반대파들을 쓸어버렸다

원래 한 그릇 안의 모두가 치국이었으므로

치국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시간낭비이다


(사실 김칫국은 아니 치국은 큰 그림이다)


다시,


치국을 치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식인보다 오래된 관습이다

치국은 버들강아지 눈알이다

치국은 마른 웅덩이에 남아있는 달비린내이다

치국은 개구충제 펜벤다졸 역병의 용사이다


전쟁은 마를 날이 없다

그러므로 다 살기 마련이다


치국아


무슨 얼굴로 밥상을 엎어 배후에 배를 부르게 했느냐

치국과 치국 아닌 것이 구호를. 일회용 접시를 돌리며

치국과 치국 아닌 것은 밥알의 미래, 버려지는 백지 어쩌면 수도 수호

치국과 치국 아닌 것은 변방의 노래, 극적인 화해 원래가 하나 아니면 백


나는 누구를 위해 종을 기록하나

종은 엎어진 섬

섬이 담긴 그릇

치국은 성을 쌓고 연기처럼 활활 오른다 도대체 누구 맘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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