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 그녀와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지진을 감지하는 그녀의 딸과
우울증 약을 먹고 있는 그녀의 손녀가 함께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건 세기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세 사람의 여행을 그 밖의 가족들은 말렸다. 서로 시간을 내서 다 같이 갈 기회를 마련해 보자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때 또 가고 이번에도 가겠다고 우겼다. 그녀와 그녀의 딸과, 그녀의 손녀가 함께 있으면 항상 누군가는 분노했고,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우울했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부터 혼자 있는 것을 무척 힘들어했다. 그렇다고 누구와 같이 사는 것도 원치 않았다. 다만 며칠 여행 정도는 괜찮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아들은 호주 시민이라 먼 길 오기가 힘든 상태였고, 세상에서 제일 예쁠 것이라고 믿고 있는 막내딸은 시댁을 가야 했으므로, 하릴없이 시간이 여유로운 큰딸이 당첨된 것이다. 막내는 ‘오 마이 갓’을 세 번 외쳤다. 막내는 그녀의 딸의 딸에게 SOS를 보냈다. 우울한 그녀의 손녀는 우울증 약을 입에 털어 넣고 엄마를 위해 할머니와 함께하는 여행에 합류했다.
사실 이번 여행을 계획한 것은 그녀의 딸이었다. 2박 3일의 여행이라면 침을 몇 번 꿀꺽 삼키면 되리라 생각했다. 또 혼자된 뒤로 그녀의 의기소침해 있는 모습이 내심 안쓰럽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특별한 사람이다.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을 뿐만 아니라, 팔순을 훨씬 넘긴 나이에 중학교 검정고시와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한 번에 모두 합격한 것이다. 영어는 백 점이었다. 주님을 믿는 그녀가 가장 어려워했던 과목은 과학이었다. 명명백백한 하나님 말씀을 드리대며 진화라는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아무튼 진화론을 부정한다 치더라도 어렵지 않게 합격하였고 이번 여행이 고등학교 졸업여행이라는 데에 불만이 없었다.
식당에서 밥을 먹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그녀의 딸은 김밥을 쌌다. 2박 3일 내내 먹어야 할 김밥이었다. 김밥에는 시금치가 꼭 들어가야 하고 유부도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햄과 맛살은 들어가서는 안 된다. 밥은 고슬고슬해야 하고 식초와 참기름 소금 조합은 그녀 입에 딱 맞아야 한다. 시작이 순조로웠다. 그녀는 김밥을 먹으면서 ‘맛있다’를 연신 외쳤기 때문이다.
PD였던 손녀는 어느 날 방송국을 시원하게 때려치웠다. 그 뒤로 어찌 사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손녀는 외할머니를 빼다 닮았다.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 따위에 관심은 없지만 관심법을 좀 한다. 사람들의 마음이 구석구석 보이기 때문에 도저히 대화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처럼 김밥을 좋다 한다.
다행히 그녀의 딸은 그들에 비해 머리가 나쁘다. 대체로 무엇이든 중간 정도이다. 대신 눈물이 많다. 그녀의 딸은 어린 시절 엄마를 잃고 고아로 지낸 적이 있다. 그때 누군가 건빵을 주며 “너 참 눈이 예쁘구나. 그런데 자꾸 울면 팔자가 세다.”라고 한 말을 지금도 기억한다. 다행히 늙어가면서 눈물은 줄었지만 푸념이 늘었다.
여행 중에 그녀는 쉬지 않고 말을 했다. 이야기의 가장 큰 줄거리는 언저리파 할망구들의 패싸움에 관한 것이다. 동네 언저리에 모여서 채소를 파는 망상과 공주와 (정확하게는 공주댁이지만) 멱살과 도둑년의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어서 나중에는 귀가 얼얼할 정도였다. 딸은 그녀와 함께 망상을 저주했고 공주를 측은하게 생각했으며 멱살에 대해서는 고소하겠다고 큰소리쳐주었다. 정말 고소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팔순 넘은 그녀를 이제 측은하게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둑년에 대해서는 역성들 수 없었다. 잘못하다간 판이 커질 지경이었다.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는 들통나지 않게 뒷걸음치는 것이 상책이었다.
-주님이 말씀하시길 원수를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잖아. 도둑년도 원래부터 도둑년은 아닐 거야. 사랑으로 감싸다 보면 회개할 날이 있겠지.
주님을 들먹였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분노했다. 분노와 눈물과 우울이 범벅이 될 지경에 대관령을 넘게 되었다. 대관령 꼭대기에서 귀가 먹먹해지자 그녀가 소리쳤다.
"오오 지구가 멈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