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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대노 Apr 22. 2022

고부사이, 처음부터 좋았던 건 아닙니다. (IV)

첫 손녀 이후 다시는 아이를 보지 않겠다던 친정엄마는 2.65kg으로 작게 태어난 손녀가 안쓰러워, 내 아이가 7살 때까지 바쁜 딸을 대신해서 키워주셨다.

이를 맡기느라 친정 엄마네 집 근처로 이사했고, 바쁘다는 핑계로 집에서 밥 먹을 일이 있으면 엄마네 집에 가서 끼니를 해결했다.

친정엄마는 맛있는 게 있는 날엔 사위 도시락까지 싸주었다.

남편이 교통사고가 났을 때, 그 새벽에 경찰서로 달려간 것도 친정아빠였다.


내 딸과 우리 부부가 그렇게 친정 부모님 우산 밑에서 살아가는 동안 시가의 역할은 없었다.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유치원 입학과 졸업식에도 내 딸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이모들, 이모부들만 있었다.

유치원 행사에도 바쁜 엄마 아빠를 대신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이모들, 이모부들이 참석해주었다.


친정은 핑계를 만들어서 가족파티를 하는 집인 반면, 남편네는 생일도 한번 챙기지 않는다.

그래서 남편의 생일에는 친정엄마가 상을 차리고, 금일봉을 주는데, 나는 시댁에서 생일 축하 문자 한번 받아본 적이 없다. 남편, 손녀 생일도 마찬가지이다.


친정 아빠는 매 행사마다 자식들, 손자 손녀들의 금일봉을 챙긴다.  

자식들의 생일엔 아빠가 비싸고 좋은 곳에서 밥을 사고, 사위들의 생일엔 엄마가 50만 원씩의 금일봉과 생일밥을 차려주신다.

생일,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기타 등등 아이들의 빨간 날엔 10만 원씩 들어있는 봉투가 빠진 적이 없다.

아이들의 학교 입학에는 초등학교 백만 원, 중학교 삼백만 원, 고등학교 오백만 원의 장학금도 주신다. 아이들의 침대나 책상을 좋은 걸로 사주시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행사에 시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관계가 지속되면서 시가가 싫어서 시금치도 먹지 않는다는 말이 이해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철딱서니 없는 딸 같은 고부관계가 되었냐고?

그건 내 남편 때문이었다.


남편은 사려 깊은 사람이다. 이 말 저 말 옮기지도 않는다.

내가 욱해서 시댁에 서운한 점을 다다다다 쏘아붙여도 조용히 혼자 듣고 만다.

본인이 듣기 싫은 얘기도 다 들어주고 나서, 내가 화가 좀 풀린 것 같으면 웃으며 말한다.

"다 했어? 속이 좀 풀렸어?"


싫은 만큼 얼굴에 드러나는, 제 멋대로인 며느리가 마음에 안 드는 시댁 어르신도 분명 있으셨을 건데, 듣기 싫은 소리 한번 내 귀에 들어온 적이 없다.

남편이 시가와 나 사이에서 중재한답시고 말을 옮기기라도 했으면, 시가 어르신들과 지금같이 지낼 수 있었을까?


게다가 내가 아무리 시가를 멀리해도 내 남편은 한결같이 내 부모에게 잘하는 사람이었다. 친정부모님이 사위들 다 착하지만 둘째 사위가 제일 착하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그런 남편을 보면서 그전에 화가 났던 일들이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남편처럼 잘할 수는 없어도 묻어두고 살 수는 있겠다 싶었다. 사실 나 혼자 파르르 화가 났던 거지, 누가 나한테 뭐라 한 적도 없었으니 말이다.



시어머니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었다.

카드 주시며 사고 싶은 거 사라 하셨는데, 돈 없는 집의 돈을 함부로 쓸 수 없다고 오해하고 소박하게 혼수물품을 산 건 나였다.

우리가 덜 고생하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재개발 빌라를 제안하셨지만, 확고한 신념으로 "사지 않겠습니다. 저희 형편에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저는 부동산 투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라고 했으면 됐을 일이었다.

나한테 제사 음식 해오라고 한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어쩌다 보니 친정엄마가 제안했고, 나 편하자고 그 제안을 덜컥 수락해 놓고, 그러고 나서 나 혼자 열 받은 것뿐이었다.

행사 안 챙기는 건, 서로 안 챙기게 되었으니 뭐 됐다. 그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내 마음 혼자 요동을 친 것뿐이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장사를 접고 혼자 사시는 시어머니는 가끔 한 번씩 우리 집에 오시면 그동안 친정엄마만큼 못해준 것들을 한꺼번에 다 해주시려는 것처럼 이것저것 해주시려고 애쓰신다.

그리고 돌아가실 땐 자식들이 잠든 틈을 타서 몰래 도망가듯이 가신다. 물론, 귀 밝고 예민한 며느리 덕에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지만.


아마도 집에 가실 때 내가 드리는 용돈이 부담스러우셔서, 그거 받지 않으려고 그러시는 것 같다.

어차피 매번 걸리는 거 인사하고 가라는 며느리의 잔소리를 들으며, 차 보조석에 던져진 봉투를 끝내 쳐다보시지도 못하고 그렇게 가신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셔서 고맙다고 전화하신다.


지난 제사 때, 오신 김에 남편 생일에 밥 먹고 가시란 말에 며느리 생일 지나친 게 미안하셨는지, 시어머니는 증조할머니까지 모시고 살면서 일 년에 제사만 12번이 넘는 시집살이를 하신 탓에 시아버지한테 어른들 생일까지만 챙기자고 하셨다고, 그 뒤로 생일을 챙겨본 적이 없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생일에 시어머니한테 꽃바구니 선물을 받는 언니를 보면서 기분이 묘할 때가 있기도 했지만, 이제 누가 생일을 묻는 것도 부담스러운 나이가 되다 보니, 서로 챙기지 않는 문화가 편하기도 하다.


시어머니와 나는 이렇게 조금씩 편해지고 있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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