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깊은 추억 상자를 열다.
여름이 다 가고 가을에 들어선 지 한참이다. 높고 푸른 하늘과 코스모스를 맘껏 보기 위해 김제로 향했다. 바라람을 느끼며 가족과 걷는 것은 언제나 든든하고 가슴 찡하다.
엄마! 이거 봉숭아꽃 맞지? 나 봉숭아 물들이고 싶어. 엄마 해줄 거야?
그래, 한 번 해 보자. 그런데 여름이 다 지나서 그런지 꽃이 얼마 없네. 있는 거라도 가지고 해보자.
봉숭아를 꼽게 빻았다. 백반이 없어 그냥 꽃과 잎만 넣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백반이 없을 땐 소금을 넣어도 된다. 빻아 놓으니까 정말 얼마 안 되는 양이다. 조금씩 아이 손에 올려놓는다. 비닐장갑을 손톱 모양에 맞게 잘라 조심조심 넣고 - 잘 못 하면 빼고 다시 올리고를 반복해야 한다. - 예쁜 끈으로 살살 묶어 고정해 주면 끝이다. 그게 끝이었으면 좋겠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다. 가려움, 불편함과의 싸움이시작 된다. 화장실에 가는 것도, 가려운 곳을 긁는 것도, 물을 마시는 것도 손가락으로 해야 하는 것은 다 하기 힘들다. 아이는 ‘엄마~’를 연신 외쳐댄다. 아이의 인내력과 봉숭아물의 색은 비례한다. 우리 아이는 얼마나 고운 색을 기다릴 수 있을까?
한여름 밤, 모깃불을 피우고 마당 앞 평상에 앉았다. 너무 설레고 좋아서 저녁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저녁 먹은 것이 치워지고 옥수수와 찐 감자가 평상에 놓였다. 포슬포슬 감자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맛이다. 할머니는 봉숭아를 백반과 함께 곱게 빻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어린 내 마음도 함께 출렁였다. 할머니는 곱게 빻은 봉숭아를 내 손톱에 앙증맞고 소복하게 올려놓으셨다. 삐뚤삐뚤 잘라 놓은 비닐로 내손톱을 감싸고 하얗고 튼실한 실로 칭칭 동여맨다. 하늘의 별도 예쁘고 모깃불 냄새까지도 즐거웠다.
열 손가락을 칭칭 동여맨 나는 제일 좋아하는 옥수수도 감자도 제대로 먹을 수가 없다. ‘아~~~’ 하고 입을 벌리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내 입에 감자와 옥수수 알갱이를 넣어 주셨다. 오물거리는 내 조그만 주둥이를 할아버지는 좋아하셨다. 먹는 것도 맛있게 먹는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하셨다. 그저 오물거리며 먹기만 해도 칭찬을 받던 시절이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끝을 알 수 없는 인자하고 따뜻한 사랑을 차고 넘치게 주고 또 주셨다.
하룻밤을 이렇게 꽁꽁 동여맨 손가락으로 지내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할머니~~~’, 물을 마시고 싶어도 ‘할머니~~~’ 하며 고된 하루를 지내시고 단잠을 주무시는 할머니를 깨워야 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내 강아지 화장실 가고 싶어?’, ‘내 강아지 물 마시고 싶어?’ 하시며 슈퍼우먼처럼 다 해결해 주셨다. 손가락의 봉숭아를 당장이라도 빼버리고 싶지만 어린 나이에도 빨갛고 예쁜 손톱을 갖고 싶었나 보다. 빼지 않고 한 고비를 넘긴다.
꽁꽁 묶은 새하얀 실이 붉게 물들어져 내 손가락의 숨통을 막는다. 더 단단하게 고정하기 위해 힘껏 묶어주신 할머니의 사랑이 느껴진다. 손가락 끝에 심장이 있는 것처럼 손가락이 쿵쾅거린다. 아프고 가렵다. 이렇게 또 한 번의 고비가 찾아온다. 빼버리고 싶은 마음이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 고민보다 더 깊고 간절했다. 여러 번의 고비를 이겨내고 나면 아침이 밝아온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퉁퉁부은 눈으로 환희의 순간을 맞이 한다.
‘할머니, 아침 됐으니까 빨리 이거 빼 줘!’ 하던 일을 마저 하고 빼주신다는 할머니 앞에가 떼쓰기 신공을 쓴다. -내가 조르기 기술에 들어가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산 아이들의 특권이다. 엄마의 등작 스매싱을 피할 수 있는 든든한 방패가 있으니 세상에 거칠 것이 없었다. - 할머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시며 연신 까치집 같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신다. ‘ 어디, 잘 들여졌는지 보자. 우리 강아지는 손톱도 이렇게 예쁘구나. 손이 예쁘면 고생 안 하고 산다고 했느니라. 곱게곱게 살거라.’ 하나둘 벗겨지는 비닐 속 내 손톱은 잘 익은 앵두처럼 빨갛고 예뻤다. 생전 처음 보는 예쁜 손톱이 좋아서 연신 손을 하늘을 향해 올려다보곤 했다.
‘엄마, 봉숭아 물이 잘 들여질까? 엄마, 원래 이렇게 가려워? 엄마, 지금 빼면 안 될까? 엄마, 화장실 가고 싶은데 어떻게 하지? 엄마, 물 좀 따라주면 안 돼? 엄마...’ 어떻게 물들여질까 들뜬 마음과 가렵고 아파서 빼고 싶은 마음의 갈등이 너무 잘 이해가 되어서 더 귀엽고 사랑스럽다. 아이를 키우며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는 것 같다. 오늘처럼 아이를 통해 잊고 있었던 추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봉숭아물이 잘 들어서 순간순간 빠알갛게 물들여진 손을 하늘을 향해 올려다 보고 그 순간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봉숭아꽃
어린아이 같은 마음씨
그 마음을 더 오래
간직하길
엄마도 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