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언 Dec 10. 2022

아빠의 취향을 존중해 볼게요.

같이 살아온 '식구'로서 태용씨의 음식취향은 어느 정도 압니다. 면요리와 해산물을 사랑하고, 아메리카노는 언제나 뜨겁지만 물을 더 넣어 연하게 마시죠. 하지만 음식을 제외하고서는 태용씨가 어떤 걸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잘 몰라요. 태용씨가 어떤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하는지, 어떤 계절에 반응하는지, 어떤 색감을 사랑하는지,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 하는 것들엔 크게 관심이 없던 무심한 딸입니다.


 특히 태용씨와 나는 티비프로 취향이 참 맞지 않습니다. 태용씨는 소파에 가로누워 골프티비나 하나같이 비슷비슷한 복수극을 다루는 중국 영화를 봅니다. 이를테면 이런 거죠.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갚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무도를 갈고닦아 재야의 고수로 살아오다 마침내 펼쳐지는 복수 활극! 뻔한 그 스토리들이 나는 참 싫었거든요. 태용씨에게 TV프로 취향을 물었죠. 당연하게 중국 영화나 골프 TV라고 답변하리라 예상하고서요.


그런데 의외로 "기억에 남지 않는 게 프로가 좋다"라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신나게 치고박고 싸우고, 보고 나서 생각할 필요도 없는 그런 프로가 좋다는 거예요. 태용씨가 왜 치고박는 중국 영화를 보는지 궁금해하지는 않고 그냥 나랑 맞지 않다고만 치부해 버렸던 과거의 내가, 아,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태용씨는 중국 영화 말고도,


짙은 녹색을,

맑은 공기가 있는 사람 없는 바닷가를,

탈무드와 람세스를,

트로트와 가수 최백호를,

만물이 소생하는 봄과 동물을,  

도마도(토마토아님)와 참외를,

운동으로는 골프를 좋아합니다.


누군가의 취향은 그 사람의 방증이지요. 한 사람의 취향은 시대상이나 성향, 가치관을 반영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무엇인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이 자리잡기까지는 비슷한 카테고리의 다양한 선택지들이 마음에 들었다 들지 않았다 하는 시간들이 쌓였을 겁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가까이 지내면서도 취향 존중의 시간은 쌓지 못했다는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앞으로는 태용씨의 취향을 각별히 존중하여 넉넉한 마음으로 중국 영화를 보는 태용씨를 이해할 겁니다. 아, 물론 같이 보진 않을 거예요, 저의 취향도 소중하니까요.


사람이 없는 바닷가에서 반려견 구름이랑


이전 25화 다정한 부녀 외식과 다정하지 못한 알러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