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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언 Dec 11. 2022

은쪽같은 내새끼

아들과 딸이 태어나던 날 모두 태용씨는 부재중이었습니다.


82년, 아들 재기씨가 태어나던 날은 동료들과 철야작업을 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5년 차 직장인 태용씨의 눈코 뜰 새 없는 시간 속에 아들 재기씨가 태어났거든요. 지금의 상식으로는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갔을 테지만, 그때는 그럴 수 없었나 봅니다.


87년 딸,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던 날 역시 태용씨는 바빴습니다. 어느덧 10년 차 직장인이 된 태용씨는 건축사 시험공부에 한창이었거든요. 아내 경애씨의 진통시간이 길어지자 집에서 공부하려고 다시 돌아온 사이에 내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아들 재기씨와 딸인 나는 그렇게 태용씨의 자녀로 자라게 됩니다. '딱히 애먹이는 것도 없고, 엇나가는 것도 없이' 평범하게 잘 커준 게 보람이었지요. 그 시대의 여느 아버지들과 같이 그저 사달라는 거 사주고, 데려가 달라는 곳에 데리고 가며 큰 고비 없이 우리를 키우셨습니다. 가끔은 마음을 힘들게도 했지만 소소하고 평범한 날들이 더 많았던 세월로 회고합니다. (아, 물론 주양육자가 아니었기에 아내 경애씨의 의견은 다소 다를 수 있습니다.)


아들 딸 모두 나이를 꽉 채워 결혼합니다. 자식들의 늦어지는 결혼에 조급증도 났었지만 티 낼 수 없었던 날들이었지요. 50대 중반 급격히 가세가 기운 탓에 경제적으로 든든히 지원해줄 수 있는 여건이 안되었습니다. 자연히 결혼하라고 권하기도 어려웠고요. 아들 딸은 늦게나마 제 짝을 만나 가정을 꾸리게 됩니다. 마냥 어린애만 같던 아들 딸이 가정을 이루고서 진짜 성인이 된 것 같아 "정말 좋았다."라고 표현하는 태용씨입니다. 그거 아시나요? 혼주석에 아내 경애씨와 나란히 앉아 자식의 새 출발을 염원하는 태용씨의 얼굴도 '정말 좋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아들 재기씨는 아들을, 딸인 나는 딸을 낳았습니다. 태용씨는 아들, 딸, 손자, 손녀를 고르게 갖춘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깨닫게 되었지요. 태용씨의 금쪽이들은 바로 손자와 손녀라는 것을요. 아들 재기씨와 나는 금쪽보다는 좀 덜한 은쪽이라는 것도요. 손자 손녀에 대해 묻자, 태용씨의 목소리가 한껏 부풉니다.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와 아내 경애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는 끝끝내 등장하지 않던 '사랑'이란 단어가 등장하기에 이르지요.

손자 손녀는 다른 사랑인 것 같다. 너~무 좋아.


손자 손녀까지 따~악 얻고 보니
행복하다 해야 되나? 행복하더라!

무뚝뚝한 경상도 할아버지에게서 '사랑'이란 단어마저 끌어내는 손주들입니다. 네, 은쪽이인 나는 금쪽이인 내 딸에게 졌습니다.


태용씨의 노년이 금쪽이, 은쪽이들과 더 반짝반짝 빛나길 바라봅니다.


금쪽이 의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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