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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여,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자주독립, 통일된 나라를 열망했던 우리의 역사 4•3

'제주4•3평화공원'을 방문했다. 지난 주일 '너븐숭이4•3기념관'을 방문하면서 그동안 단편적 지식으로만 알고 있었던 4•3에 대한 이해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그래서 1978년 우리나라 최초의 4•3 관련 출판물인 현기영 작가의 <순이 삼촌>을 읽었고, 2013년에 개봉한 독립영화로 제주4•3사건을 다룬 <지슬>을 보았다. 그리고 기념관에서 받은 관련 유인물과 서적을 읽으며 4•3에 대한 정리를 해 본다.


4•3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제주 4•3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과 서청(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독선거) 및 단정(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제주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결론)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통치에서 해방된 우리나라는 자주독립국가로서의 위치를 지킬 힘이 없었다. 우리 스스로 나라를 재건하려고 했던 여운형 선생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있었고, 각 지역에 '인민위원회'가 설치되어 치안과 재건을 위해 힘쓰기 시작했지만 미국 군사정부(미군정)는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지역을 '점령(occupy)'하면서 자신의 통치를 위해 인민위원회를 강제로 해산했다. 그리고 효율적으로 통치한다는 명분 아래, 과거 일제 때 일제의 통치기관에서 일했던 관료들을 대거 등용하여 통치기구의 손발로 활용했다. 우리 민족의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4•3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 백비(白碑),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그 가운데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활발한 활동을 하던 '제주도의 유일한 당이자 정부'로서 제주민의 큰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제주도를 통치하던 미군정은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고 부정부패의 친일파 세력을 대거 등용하면서 갈등을 키웠다. 이런 상황에서 제주4•3의 도화선이라 할 수 있는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발생한다.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좌우익 없이 3만명이 모여서 진행되었다. 외세의 간섭없이 통일된 하나의 국가, 통일 독립을 외치던 중, 말발굽에 다친 아이를 그냥 두고 가는 기마대를 향해 흥분한 군중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그러자 기마경찰이 제주경찰서로 달려간 다음 미군정 경찰이 민간인을 향해 총을 쏘아 민간인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을 당했다. 명백한 경찰의 과잉대응이었으나 경찰은 오히려 3•1절 집회 주동자를 잡아 가두기 시작했다.


이에 분노한 제주도민 전체가 항의의 뜻으로 총파업을 단행했다. 그러자 미군정은 제주도를 '빨갱이 섬(Red Island)'으로 규정하고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고문하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육지에서 응원경찰, 북한에서 공산당 때문에 탈출한 사람들로 결성된 '서북청년회'를 대거 들여와 빨갱이 섬을 본격적으로 탄압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350명의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무자비한 탄압과 남쪽만의 단독선거 5.10을 반대하면서 '탄압이면 항쟁! 통일독립 전취! 단선단정 반대!'의 구호를 외치면서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를 습격해 14명이 사망하게 되었다.


미군정은 이를 북한과 연류된 공산주의자들의 난동으로 규정하고, 평화적 사태 해결을 하려는 한국군 김익렬 중령의 평화협상을 방해하면서 오라리 방화사건과 민간인 총격을 감행한다. 그리고 강경파인 박진경 중령을 임명하여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려 한다.


하지만 제주도민은 분단을 가져오는 5.10선거를 거부하여 3명의 국회의원을 뽑는데 단 1명만 선출되고 2곳은 투표 거부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선거가 치뤄지지 않았다. 미군정 장관은 재선거를 명령하지만 재선거마저 무산되자 남한에서 유일하게 선거가 보이콧된 제주 주민들을 '청소'하는 작전에 착수하게 된다.


1948년 7월 17일 헌법이 공포되고, 8월 15일 정부수립가 수립되지만 이승만 정부는 12월 유엔에서 새 정부 승인 전에 제주도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고, 미군정 역시 1948년 말까지 한반도 철수가 예정되어 있었기에 '초토화 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1948년 10월 17일, 토벌사령관은 "해안선에서 5킬로미터 이상 지역은 적성구역으로 간주하고 그곳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사살하겠다."는 포고령을 내린다. 이어 11월 17일에는 한국 헌법에도 없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무차별 학살을 조장하였다.


애당초 군경이 파악한 무장대는 500명 정도였으나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민간인 3만을 희생시켰다. 산으로 도망간 무장대 역시 식량보급이 끊기고 경찰과 군에 의해 토벌당하자 무차별 보복을 일삼기 시작했다. 결국 보통 사람들은 ‘산도 무섭고 군경도 무서운 광기의 시대'를 견뎌야 했다. 이런 미친 세월은 1949년 봄까지 지속되었고, 이후 1954년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사람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제주4•3평화공원 내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복도


이후 30년 넘게 '빨갱이' 소리를 들으며 살아야 했던 제주민들은 1987년 6월 항쟁과 민주화를 통해 1989년 4월 3일에야 첫 공개 추모제를 열 수 있게 되었다. 그후 각개각층의 집단적 노력으로 2000년 4•3 특별법, 2003년 제주 4•3사건진상보고서 발간과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있었지만 4•3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다. 1947년 3•1절 대회로부터 시작된 4•3은 분단에 반대하고 통일된 나라를 염원하던 제주도민의 열망의 표현이었다. 국민을 지키지 못한 힘없는 우리나라는 4•3을 통해 인권과 평화, 통일의 나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 그것만이 4•3희생자들의 원혼과 그 가족, 모든 제주도민을 향한 가장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제주여, 우리가 저지른 모든 일에 대해 참으로 미안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평화의 섬으로 남아 있어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제주4•3평화공원 내 시신을 찾지 못한 행방불명인표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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