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에 종종 나를 포함한 세상이 갑자기 영화처럼 느껴지는 경험을 했었다. 길을 걷고 있는데 내가 내가 아닌 것 같고 나는 카메라 뒤에 있는 감독이 된 것마냥 나와 세계가 분리된 것 같았다. 나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장면이 나와 별개인 것처럼, 마치 그 모든 상황을 내가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을 겪은 적 있다.
이런 증상은 스트레스를 크게 받는 상황에서 나타나곤 했는데 평소라면 힘들어했을 상황에서 나는 오히려 차분해졌고, 감정의 동요도 일지 않았다. 상황이 안 좋아져도 그것이 내 일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모든 게 남의 일처럼 느껴지고 영화 속 세상의 일처럼 느껴졌다.
인생은 흘러가고, 나는 공부를 하고 일을 해 돈을 벌고 친구를 만나 노는데 이 모든 일이 나와 무관한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에 나는 스스로가 몽유병 환자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직접 행동하고 있음에도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몇 번 그런 증상을 겪다가 사라졌는데 바로 오늘, 몇 년만에 다시 그 느낌을 받았다. 이 증상은 '이인증'이었다. 얼마전 정신과 의사들이 진행하는 유튜브 영상을 보다가 알게되었다. 나만 겪은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신적 이상 증세 중 하나였다.
어릴 때는 그저 어리둥절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왜 이런 이상한 느낌이 들지? 하며 그저 흘려보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심한 스트레스를 회피하기 위한 뇌의 무의식적 반응이 아니었을까 싶다.
오늘 겪은 현상은 이인증까지는 아니다. 예전처럼 세계와 내가 분리되어 있고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약간 몸이 붕 뜨는 듯하고 조금의 비현실감을 느낀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하는 느낌이 든다.
요즘 나는 몽유병 환자 같은 삶을 살고 있다. 나는 분명 삶을 살고 있는데, 살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고, 회사에 가 일을 하고 저녁에는 운동을 하거나 집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잠에 들고. 내 몸은 움직이고 있는데 이것이 삶을 사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지금 힘든 건지 아닌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하루도 쉬지 않고 주 7일을 일하고 저녁에는 술을 마시고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난다. 몸에 분명 무리가 갈 만한 스케줄인데 내가 힘든 건지 안 힘든 건지 아리송하다. 내 상태를 모르겠다. 이러다 다시 이인증이 오는 게 아닌가 걱정도 된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는 업무 스트레스가 있지만 이전 회사에 비해 스트레스가 훨씬 덜하다. 대기업에 파견직으로 다닐 때는 마음이 썩어들어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이 회사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욕구가 빗발쳤었다. 내 자리가 아니라고 느껴졌다.
지금 회사는 거의 콜센터마냥 밀려오는 전화 때문에 전화선을 끊어버리고 싶긴 하지만 이전 같은 깊은 수렁에 빠진 느낌은 없다. 아직은 회사 내 인간관계로 오는 스트레스도 없고 자괴감도 없다.
다시 어느정도 평온을 찾은 듯했다. 그런데 이제는 일상생활의 비현실감이 나를 찾아오려 하고 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삼재가 들었나. 올해는 대체 왜 이럴까?
삼십 대를 이렇게 다사다난한 일들로 시작할 줄은 몰랐다. 요즘 나는 내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규칙적이고 성실하게 살고 있는데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모든 것이 엉망진찬으로 느껴진다.
요즘 그런 생각을 한다. 왜 나는 엉망인 어른이 된 것일까. 어른이란 무엇일까. 나는 열 다섯 살에서 조금도 자라지 않은 것만 같다. 사회생활에 필요한 조금의 요령만 생겼을 뿐.
요즘 내가 느끼는 감정이 뭔지 나도 모르겠지만 근본적인 외로움과 공허함이 문제이지 않나 싶다.
좋은 인간관계가 행복의 열쇠인 것은 과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다. 모든 사람은 타인과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나도 사람이기에 타인과 감정을 교류하고 어울리고 싶은 욕구가 있다. 외로울 때면 사람이 그립기도 하고 좋은 친구나 애인을 만나 주기적으로 만남을 가지고 싶다.
사람들은 외로울 때 절대 타인을 통해 외로움을 해소하려고 하지 말라고들 한다. 내가 감정적으로 나약해져있을 때는 나쁜 사람들만 꼬일 뿐이고, 둘이 괴로운 것보다 혼자 외로운 것이 낫다고들 한다. 매력적이고 강한 사람은 절대 타인에게 기대하거나 사랑을 구걸하는 짓을 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모두들 그렇게 살지 못 하면서 그렇게 말한다.
인간이란 게 참 못 믿을 존재다. 나를 실망시키고 상처주고 고통에 빠트리고 배신하고 그렇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괴로움이 얼마나 큰 지는 숨 쉬고 있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타인은 지옥 같은 존재니까.
그러니 힘들 때일수록 사람에게 기대거나 인간관계에서 의미를 찾으면 안 되지만, 다 알지만, 최은영의 말처럼 그런 밤이 있다. 정말 가끔은, 나를 배신하고 비난하고 상처줄 수 있는 사람이란 존재에게 기대고 싶은 밤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