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2세트. 걱정 말아요, 그대.

잘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by writer Lucy

8시 정각. 아이패드에서 울리는 알람으로 잠을 깬다. 기상과 함께 흩어져버린 꿈조각들을 이어 붙이다 이내 단념하고 이부자리를 정리한다. 오전에는 심리학 강의를 듣고 정성껏 차린 점심을 배불리 먹는다. 오후에는 심리학 공부보다는 약한 집중도를 요하지만 흐트러짐을 허용하지 않는 일을 순서대로 처리해 간다. 글 쓰기, 심리학 과제, 이미 한 일에 대한 피드백을 정리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한 구상을 하는 게 주 일과다. 운동할 시간이 다가오니 운동 중 허기를 느끼지 않도록 간식을 먹으며 인터넷 서핑을 한다. 일에 관한 것이든 개인적 고민이든 '운동하면서 생각해 보자'하고 집을 나서지만 운동하는 내내 그저 '(드럽게) 힘들다. 제발 빨리 끝내고 싶다'를 속으로 울부짖다 집에 와 씻고 침대에 눕는다. 이 시간만을 기다렸던 질문이 늦은 밤 빛으로 돌진하는 나방처럼 나에게 와 붙는다. '지금 잘 살고 있는 건가'.


'잘 살고 있다'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걸까. 논할 필요도 없이 인생을 마주한 당사자가 정해야 할 것 같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것 같지 않다. 나 또한 그렇다, 아니 그랬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나잇대별 해야 할 일'에 제일 목매는 사람은 어쩌면 나였다. 누구나 알법한 인서울 대학에 가고, 20대 중반이면 안정적인 직장을 구해 연차별로 사원, 대리, 과장 등을 거쳐 승진한 후 결혼해 아이를 낳고 한 가족을 꾸려 늙어가는 일. 하지만 치사하게 그걸 드러내놓고 욕망하진 않았다. 그것과 전혀 상반되는 행동을 하면서 '근데 나 이렇게 해도 되나?'를 걱정하는 기이한 행보를 걸었다. 인서울 대학은 갔지만 한 회사에서 승진을 이어갈 만큼 오래 있도록 자신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차라리 사회적 기준에 수긍하든가 아예 상관없이 살았으면 마음과 몸 둘 중 하나는 편했을 텐데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은 나는 '어떻다'라고 특정하기도 애매했다. 사회적 기준에 따르면 이대로 굳어질까 두려웠고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무능하고 종잡을 수 없는 인간으로 낙인찍힐까 무서웠다. 결국 여길 가도 지옥이고 저길 가도 지옥인 모양새였다.


하지만 이런 갈등은 갈수록 그 영향력이 약해졌다. 매사 결정해야 할 시기마다 불쑥 나타나 한쪽에선 '받아들여, 절대다수가 그 길을 택한 건 그만큼 편하고 좋은 거니까 그렇겠지! 밑져야 본전이다', 정반대에서는 '너 그렇게 살다가 너다운 건 하나도 못해보고 그대로 죽을래? 이걸 받아들이는 순간 넌 도태돼'라며 싸우던 내 미니미들은 그 목소리가 희미해지고 있다.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흑백논리로 삶의 방식을 재단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회사 다니면 회사에 올인해야 하고, 다른 걸 할 거면 아예 관둬야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 모두를 아우르며 본인이 원하는 삶의 요소를 취사선택해 사는 사람들을 주변에서도 흔히 찾을 수 있고, 나도 그 가능성을 엿보고 있으니까.


운동도 갈등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을 주었다. 운동을 하면서 얻게 된 체력은 현 상황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것까지 넘보고 시도해 볼 수 있는 에너지를 주었다. 체력이 안 좋고 예민한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이런 사람들은 뭘 시작하는 것, 심하게는 시작한다는 생각 자체로 이미 부담을 느낀다. 하지만 운동으로 체력을 기르니 '야, 다 조용히 해. 일단 시도해 보고 아님 말아'하는 새로운 목소리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정신력이 힘을 갖다 보니 사회의 기준보다 내가 원하는 게 더 중요해졌다. 남들의 삶에 관한 얘기를 들어도 '저 사람은 저렇게 사는데..' 하는 생각보다 '오, 그렇구나. 근데 나는 어떻게 살지?' 하는 생각이 더 빠르게 튀어오른달까.


'지금 잘 살고 있나'를 고민하는 침대 위로 다시 돌아간다. 잘 사는 게 뭔데 -> 잘 사는 걸 누가 정하는데 -> 내가 정하지 -> 그럼 내가 생각하는 잘 사는 것은 무엇인가 등의 생각들이 블렌더처럼 빠르게 회전한다. 내가 생각하는 잘 사는 것은, 구체적으로 그려본 잘 사는 모습은 이런 모습이다. 의도했던 바를 성취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바를 도전할 수 있고 사랑하는 것들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 모든 주체는 '나'다. 이런 기준이라면 오늘 하루는 백점 만점에 백점을 가득 채운다. 의도했던 운동량을 달성했고, 하고 싶은 심리학 공부를 했으며 조카의 성장을 옆에서 지켜보며 애틋함과 사랑을 느꼈으니. 누군가 그런 삶 따위 누군들 영위하지 못하냐 비웃어도 상관없다. 내 일상의 모든 단면을 직접 체험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의 의견, 사회의 목소리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이제 눈을 감고 편안히 잠을 청한다. 나는 아무 걱정 없이 환히 웃고 있다. 꿈인가, 헷갈렸지만 이 모습은 바로 내일의 나다.


tempImageXRVtYo.heic 메모장에 적어놓고 마음이 약할 때마다 찾아봤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


글을 마무리하며.

작성한 모든 글들 앞에는 순서와 함께 '세트'라는 단위가 붙었다. 운동 세는 단위에서 따온 것인데, 운동에서는 한 동작을 최소 10회 이상 반복할 수 있어야 해당 중량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12세트라면 능숙해지고도 남을 규모겠지. 아직 좌절하고 간간히 주저앉을 때도 있지만 운동을 시작하며 달라진 건 분명하다. 그 내용은 충분히 글에 녹여낸 것 같으니 다시 얘기하지 않겠지만 지난 글들 속 'Back in the days'에서 소개했던 여러 행위들보다 운동이 우울감 해소에 '더 효과적이었다'는 것은 한번 더 얘기하고 싶다.

우울해지기 쉬운 시대고, 나와 같은 고민과 시도들을 할 수 있는 시대다. 내가 특이한 경우라 생각하지 않고 (여전히) 대단한 성취를 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일반적인 사람이 쓴 글이라면 읽은 모든 분들이 진심으로 공감하고 운동을 한번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든다.

어떤 삶을 살건, 운동이 아니더라도 당신의 눈물을 닦아줄 손수건 같은 존재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글로 전하고 싶은 마음은 이 한 가지였으니.



keyword
이전 11화11세트. 심리학자도 운동인만큼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