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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어풍차 Mar 18. 2021

버티컬 속에는 지금

                                                                                           


말간 햇살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더니 버티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베란다 곳곳에 가로줄과 세로줄을 만든다. 행여 그 빛을 놓칠 세라 서둘러 버티컬 올린다. 버티컬은 밤새 드리웠던 어두움을 걷어내고 '드르륵'소리를 내며 환한 바깥 풍경을 서서히 선보인다. 그럴 때면 나는 환한 불빛이 켜지고 막이 오르는 연극 무대를 본 것 같아 묘한 흥분에 빠지곤 한다. 가끔은 버티컬을 반쯤 올리고 만나는 세상도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다가와 그 나름대로 멋이 있어 좋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버티컬은 우리 부부 사이를 심술 난 시누이처럼 아주 고약하게 끼여 들었다


"어어! 꽃대 꺾어지지 않게 조심해. 아이, 벌써 두 개나 꺾어 버렸잖아. 내가 당신 때문에 못 살아." 

 볼멘소리를 들은 남편은 "그러면 당신이 내가 하기 전에 먼저 내리든지. 그리고 창가에 너무 가깝게 화분 두지 마세요. 버티컬이 내려오다 걸리면 또 고장 나요."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새집으로 이사와 버티컬을 설치하고 2년도 채 안 돼 고장이 나서 A/S를 받았다. 그 주범은 주로 화분들이었다. 어느 날 평소대로 무심코 리모컨으로 버티컬을 작동시켰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리드미컬하게 올라가던 녀석이 한쪽 방향으로 기울어지며 살려 달라는 듯이 괴상한 소리를 냈다. 원인은 공작 기린 꽃가지였다. 버티컬 한쪽을 가지가 살짝 스쳤을 뿐인데 그 사달이 난 것이다. 예만 해도 너무 예민했다. 그 뒤로도 버티컬은 그 예민함을 이기지 못하고 병원 신세를 더 져야 했다. 

사실 그런 일을 계속되자, 우리 부부는 버티컬을 닫지 않고 하루 종일 열어 둘까도 생각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밤이었다. 우리 아파트는 동과 동 사이가 너무 가까워 앞집에서 보면 우리 집 거실이 훤히 보였다. 그런데 앞 동 사는 사람들은 수시로 우리 집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언제 그랬나는 듯이 딴청을 피웠다. 그러니까 버티컬은 밤에는 우리 집 사생활을 지켜 주는 든든한 보호막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는 남편은 화분 때문에 버티컬이 더 예민하게 구는 거라며 되도록이면 화분을 창가에서 멀리 옮겨 놓았다. 그때부터 때아닌 화분 옮기기 전쟁이 시작되었다. 남편은 안으로 자꾸 들여놓고 반대로 나는 식물은 햇살을 듬뿍 받아야 꽃도 잘 피고 색깔도 고와진다며 창가로 옮기고 또 옮겼다. 그러기를 여러 날, 이 전쟁에서 지친 나는 스마트한 세상에 스마트하게 적응하지 못하고 편리함보다는 내 마음대로 '슥슥' 올리고 내리며 썼던 얼기설기 엮은 대 나무 발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고 시골에서 서울로 오신 아버지는 서울 생활에 적응을 못해 방황을 많이 하셨다. 그나마 서울 변두리 지역에 있는 우리 집을 다행히 좋아하셨다. 오시면 집에서 가까운 공원에도 가시고 아파트 경로당에 가서도 놀다 오시곤 하셨다. 그런데 어느 날 밖에 나가셨던 아버지가 커다란 대나무 발을 하나 사서 가지고 오셨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새것이라고 하기에는 발이 너무 허름했다. 


"아버지 이 발 어디서 사 오셨어요. 아무래도 속아서 사신 것 같은데. 내가 가서 바꿔 올게요." 했더니 아버지는 아는 사람한테 샀는데 그럴 리가 있겠냐며 펄쩍 뛰셨다. 그러나 나는 뭔가 찜찜하면서도 개운치 않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가시고 난 며칠 후, 할아버지 한 분이  아버지를 찾아오셨다. 그 할아버지는 발을 경로당 친구에게 팔았는데 한참 후에 비싸다며 반품을 하겠다고 했단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사용한 물건을 가져와 반품한 사람이 어디 있나고 하자, 두 분 사이에 언쟁이 있었고, 바로 그때 아버지가 그 발을 사시겠다고 하는 바람에 싸움이 조용히 끝이 났다고 하셨다. 


그때 그렇게 해 준 아버지가 너무 고마워 찾아왔다며 발 값으로 받았던 돈을 내게 건네셨다. 나는 아버지가 하신 일이라 마음대로 돈을 받을 수없다며 한사코 사양을 했더니 아버지가 오면 그때 돌려주겠다고 하며 돌아가셨다. 그렇게 구입한 발은 아버지가 어머니 곁으로 가시고 나서도 한참 동안 우리 집 거실 창문을 지켰다.

"이 날도둑놈아, 아는 사람한테 발을 그렇게 비싸게 팔아먹어."

"시세대로 팔았다. 어쩔래, 한참 쓰다가 반품하겠다고 하는 네놈은 날도둑놈 중에 상 날도둑놈이다"


한동안 발을 올리고 내릴 때마다 아버지와 그리고 두 할아버지가 싸우시던 그 광경이 떠올라 아버지에 대한 진한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오늘도 남편은 퇴근해서 집에 오자마자 베란다 화분부터 살핀다. 


"우리 버티컬, 수동으로 바꿀까. 예민한 저 녀석 때문에 날마다 우리가 불필요한 소모전을 벌이고 있잖아."

그러자 남편은 당신이 신경 안 쓰게 다른 방법을 연구해 보겠다며, 버티컬보다 더 예민한 컴퓨터도 잘 쓰고 있는데 굳이 수동으로 바꿔야 할까 한다. 그러고는 리모컨으로 버티컬을 내린다. 그러자 바깥 풍경이 막을 내리고 우리만의 아늑한 저녁 풍경이 무대 위로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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