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를 줄이다#2
의류 디자이너 시절 명동으로 외근을 나갔다가 시간이 애매해서 어느 대형 SPA 매장에 들렀다. 한가한 낮 시간대의 대형 의류매장에는 한눈에 셀 수 있을 정도의 사람만 있었고, 그에 비해 매장은 너무 컸고 빼곡히 걸린 옷들이 너무 많아 보였다.
‘이 많은 옷들은 과연 다 팔리는 걸까?’
브랜드에서 팔리지 않은 옷들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대충 알고 있었다. 시즌이 지난 옷들은 재고 창고로 들어간다 일부는 아웃렛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재고를 소진하기 위한 여러 가지 기획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팔리지 않고 창고에서 몇 년이 지난 옷들은? 소각된다 어떤 회사에서는 일부러 재고를 소각하는 날 직원들을 창고로 부른다고 한다. 재고가 남지 않는 옷을 제작하라는 무언의 압박인 셈이다.
패션은 사이클의 주기가 짧아서 패스트 산업이라고 부른다. 새것을 만들고 새것을 사라고 하는 주기가 짧다. 나는 이런 패스트 산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빨리 디자인하기 위해 해외출장을 가서 해외 브랜드 옷을 샘플로 잔뜩 사 오고 남의 나라 백화점에서 도둑촬영을 해야 했다. 손님인 척 잠복하고 있는 경비에게 걸린 적도 있었고,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사진을 지우라고 한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이런 게 너무 싫었지만 나중에는 그런 도둑 촬영마저 익숙하게 당연하게 하게 되었다. 그렇게 사온 옷들, 도둑촬영으로 담아 온 디테일들을 이용해 빠른 시간 안에 디자인을 마쳐야 했고 가끔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똑같이 만들기도 했다. 가끔 길을 가다 내가 디자인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아도 기쁘거나 반갑지 않았고, 내가 디자인한 옷이 판매가 잘 되어도 감흥이 없었다. 내가 디자인한 옷이 아닌 것 같았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내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지만 즐겁지는 않았다.
그 의류 매장 안에 서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던 거 같다 ‘아, 결국 나는 쓰레기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구나.’ 지금 생각하면 이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할 것까지야 없지 않았나 싶지만, (퇴사의 원인이 사람 때문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탓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날 그 대형 SPA 매장에서의 경험은 내가 회사를 그만두게 된 결정적 이유였다. 이건 단지 패션 산업의 빠른 주기가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지 패션디자인 자체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나는 잘 디자인된 옷이나 물건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나도 일 년에 두세 번은 옷을 구매한다. 옷을 자주 사야 했던, 회사를 다니던 그때와 달라진 점은 소재가 자연으로 돌아가도 무해한 면이나 리넨 소재인지 체크한다. 그리고 모피나 가죽 같은 동물성 재료를 사용하지 않은 제품을 구매하려고 하고, 또한 만드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물이 사용되는 청바지는 사지 않는다. 물론 면도 목화 재배에 많은 물이 사용되니 그것도 소비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물건의 사후를 생각한다면 석유계 섬유보다 면이 낫다고 생각해서이고, 가죽의 경우도 물건의 사후를 생각한다면 비닐이라고 볼 수 있는 인조 가죽보다는 진짜 가죽이 나은 방법이긴 하지만 생명 존중의 차원으로 접근한다면 동물의 가죽도 되도록 안 쓰고 싶은 마음이긴 하다.
흔히 물건이나 옷을 살 때 지금 당장 필요한 목적, 디자인, 가격만을 고려하곤 한다. 가끔은 단순히 세일을 많이 하니까 사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줄 서서 사는 것이니까 덩달아 살 때도 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사고 너무 쉽게 버린다. 구매를 결정할 때 필요한 목적 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너무 쉽게 사곤 한다. 물건을 살 때 사후 책임비라는 세금이 붙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물건의 사후가 지구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여부와 정도에 따른 환경부담금 같은 세금. 그런 세금이 소비할 때마다 붙는다면 소비자는 그런 물건을 덜 사게 될 것이고, 생산자는 되도록 무해한 자원을 활용한 물건을 생산하려고 조금이라도 머리를 굴리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이렇게 반 강제적인 상황이 되어야 변화가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슬프기도 하다.
물건을 사면서 물건의 소재에 대한 생각, 내가 사려는 이 물건이 여러 사용자를 거친 뒤 결국 쓰레기로 매립이 되거나, 소각이 될 때, 지구에 유해한 소재인지 무해한 소재인지에 대한 생각을 잠시라도 해보면 좋을 것 같다.
나라는 한 사람이 지구에 잠시 다녀가면서 너무 많은 유해한 쓰레기를 남기지 않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