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기획하고 있음을
"독립출판 이후에 겪은 에피소드를 써보면 재밌겠다!"
두 눈을 반짝이며 내 어깨를 치던 친구의 말이었다.
함께 독립출판물을 입고한 책방에 놀러 가기로 한 날,
지하철 2호선에서 내 책과 작가로서 겪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미 수많은 독립출판 작가들과 기성 작가들 사이에서 책 쓰는 과정과 작가로의 삶은 별 것 아닐 수 있지만.
나의 시작이 늘 그렇듯 내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으로 친구는 나의 예상 독자가 되었고,
그날 나는 이끌리듯 브런치 작가를 신청했다.
브런치 작가가 되려면 한 편 이상의 글과 소개 글을 올리고 내부 심사를 받는다.
독립출판 제작과정에 대한 책은 꽤 여럿 있지만 그 이후의 작가로 살아가는 삶을 다룬 책은 많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책을 쓰고 싶었다.
브런치 작가가 되고 나서 독립출판의 여정들을 나름 꾸준히 연재하고 있었다.
책을 만들었던 기억을 더듬어 기록을 하는 과정에서 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내 책이 탄생하기까지 기획이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최근까지도 책을 쓰려면 다들 기획의 단계를 거친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모든 일을 시작하기 앞서 '기획'이란 것을 한다.
예컨대 책방에서 열리는 독립출판 제작 워크숍 모집 안내 목차만 읽어 보더라도 첫 강의는 기획이다.
나만의 글을 책으로 써야겠다는 의지와 목표를 가지고 한 자리에 모인 그런 모임 말이다.
그런데 나는 혼자서 어느 순간 글이라는 것을 적고 있었고 목차를 수정하고 있었으며 글 사이에 사진, 그림을 끼워 넣고 있었다. 그렇다면 책을 다 쓸 때까지 나는 왜 기획을 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내 책의 특성도 있었겠지만 처음부터 책을 써야겠다는 목적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언제나 책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언젠가 서른을 마지노선으로 책 한 권을 꼭 써야지 하는 막연함이 있었다. 쓰고 싶다는 열망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을 때, 내겐 유럽 여행을 기록했던 한 달간의 일기장이 있었고 드로잉 한 흔적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나도 모르게 글감이 될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럽 여행 이후에도 어딘가 여행을 가려고 하면 늘 드로잉 준비물과 함께였다. 친구들은 나의 드로잉 여행을 부러워했고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했다. 그래서 책으로 엮어보기로 했다. 여기서 이미 나는 그림과 여행을 좋아하는 또래를 예상 독자로 설정한 셈이었다.
목차도 단순했는데 내가 드로잉 했던 도시를 순서대로 배치했고 추가로 국내 여행까지 덧붙였다. 누군가 책을 읽고 이런 후기를 남겼다. 먼 나라 유럽에서 가까운 동네로 돌아오는 구성이 좋았다고. 사실 그 또한 처음부터 기획한 게 아니었다. 드로잉의 시작이 유럽이었고 이후로는 내 형편상 유럽보단 가까운 곳을 위주로 여행했기 때문에 그 순서대로 배치한 것뿐이었다. 본문을 다 작성하고 나서 마지막 페이지에 작가의 말을 쓰며 가까운 동네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말을 덧붙여 적은 것이 전부였다. 글을 쓰는 내내 전혀 인지하지 못했을 뿐 나는 이미 목차와 플롯을 기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가지 주제로 묶을 수 있는 꾸준한 무언가가 있다면 그 모든 것이 글감이 될 수 있다.
물론 협동으로 해야 하는 장기 프로젝트의 경우 기획을 꼼꼼히 하고 컴펌을 받아야겠지만 독립적으로 하는 독립출판에서는 기획의 비중이 사실상 크지 않다.
내 생각에 기획은 멋진 계획서나 파워포인트로 깔끔하게 정리된 문서가 아니다.
그보다 일단 글을 써보는 게 가장 좋은 기획이다.
내가 어떤 종류의 콘텐츠를 낼 수 있는 사람인지는 써봐야 안다.
기획하는 이들은 기획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해졌다. 검색해 보니 <기획자의 습관-최장순>이 책의 저자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하시는 분이 2018년도에 했던 강연 제목이 눈에 띄었다. "여러분은 이미 일상의 기획자입니다."가 강연의 주제였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떠서 생각하는 모든 선택의 순간이 이미 기획이라는 것이다. 내가 생각한 관점과 동일해서 놀라웠고 한편으론 잘하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출처: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6182894&memberNo=905721&vType=VERTICAL)
어떤 주제를 정해놓고 시작하면 그 틀 안에서 쥐어짜면서 글을 쓰게 된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주제로 글을 쓴다고 가정하자. 사랑의 정의부터 사랑을 주는 법, 받는 법 등을 써 내려가다 결국 페이지 수를 늘리기 위해 이것저것 잡다한 생각들을 밀어 넣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과 관련 없는 다른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을지라도 사랑이라는 카테고리에 넣을 수 없어 아쉬워하기도 할 거다.
평소에 관찰을 많이 하고 떠오르는 것들을 그때그때 기록하다 보면 한 사람의 생각이다 보니 가치관이 반복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때 그것을 큰 줄기로 하여 예쁘게 모양을 다듬어 가는 것이다. 하나의 주제여도 좋고 그냥 나라는 사람의 스토리여도 좋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나의 콘텐츠가 된다.
창의성은 연결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우연들을 놓치지 않고 연결할 때 새로움이 보인다.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나름의 철학이다. 나는 앞으로도 주제를 먼저 세우고 책을 쓰지 않을 거다. 쓰다 보면 발견하는 우연들을 연결하여 나만의 이야기가 어딘가에 갇히지 않도록 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