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축제에 공동육아 아이들 공연이 있는 날이라,
맛있는 거라도 사 줄까 하는 마음으로
집 앞으로 나갔다.
어느 새 단풍이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있었다.
서울의 가로수 나무 수종의 순위가
은행나무-버즘나무(플라타너스)-느티나무-벚나무 순이라는데,
우리 동네는 정확히 그 네 개의 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다. ㅎㅎㅎ
봄에는 벚꽃이
'나의 계절이다! 내가 주인공이다!' 한다.
퇴근길에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지는데도
온 동네가 환하다.
어제 보니 어느 새 가을이다.
은행 나무와 단풍 나무가
'가을엔 내가 주인공이다!' 하고 찾아와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나 드라마가
실제와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영화는 대체로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다.
그 외의 사람들은 대체로 주인공을 더 빛나게 하는 배경으로서 등장한다.
누군가는 주인공의 가까이에서
주인공에게 힘을 주는 조연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주인공과 정면으로 맞서며
주인공이 가는 길을 방해하는 악역을 맡기도 한다.
조연이든 악역이든
주인공에세 서사를 부여해 주는
배경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는
둘 다 주인공을 위한 배경일 뿐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주인공과 조연이, 주인공과 배경이
아주 명확하게 구분된다.
그러나 실제 삶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가족 안에서, 친구 관계에서, 일터에서 등등
다른 이들과 함께 관계를 맺고
함께 일하고 함께 어울릴 때마다
늘 생각하는 것이 있다.
삶은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라서,
실제로는 모두가 각자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예외가 없다.
그의 인생에서는 그가 주인공이다.
내 인생에서는 내가 주인공이다.
이것을 잊지 않으려고 애쓴다.
가령 일터에서 나는 여러 회의를 지원하고 있다.
어떤 회의에서 나는
그 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갖고 있지 않으며,
회의 오는 분들이
원활하게 회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 자리에서 나는 철저하게 배경이 된다.
어떤 자리는 구성원인 동시에
준비의 주체이기도 하다.
그런 자리에서는 나 역시 모든 구성원과 마찬가지로
1/N로서 성실하게 나의 의견을 말하고
나의 몫과 역할을 다하며,
동시에 배경으로서의 역할도 다한다.
어떤 업무는 오롯이 내가 맡고 있으며
내가 주도하여 진행한다.
그 업무에서는 내가 주인공이 되어 일한다.
삶은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때로 다른 이들이 주인공인 장면에서
나는 기꺼이 배경이나 조연이 되어야 한다.
때로 내가 주인공인 장면에서는
그 역할을 잘 해내는 멋진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봄에는 벚꽃이 주인공이고
다른 나무들은 불평하지 않는다.
가을에는 은행과 단풍이 주인공이고
벚꽃은 불평하지 않는다.
자연은 자연스럽게 주인공과 배경을 오간다.
나도 때로는 앞으로 나갔다가 때로는 뒤로 빠지면서
자연과도 같이 주인공과 배경을 오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