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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월의 앤 Jul 14. 2023

하찮은 기다림

연락이 올 것이라는 이상한 믿음에 대한 배신

계속 기다렸다. 분명히 만나자고 했던 것 같은데, 결국 그의 연락은 없었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만나자'라고 했던 거라 의식이 돌아오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리는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기다렸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은 더 볼 수 있을까 봐.


그렇게 이틀을 보낸 것 같다. 물리적으로 굉장히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몇 분이라도 시간을 내 그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마치 연필 한 자루를 고스란히 올릴 수 있을만한 긴 속눈썹이 부럽기도 하고, 그저 아름다웠다. 아무렇지도 않게 갑자기 예상치 못한 그리움이 솟구칠 때가 있다. 그 순간에 몰두했던 나의 감정에 대한 집착인 건지 그에 대한 집착인 것인지 정확한 경계선은 알지 못한 채 그냥 그 순간에 나를 완전히 굴복시키고 말았다.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 나를 간헐적으로 괴롭히는 것에 대해서도 그렇게 성가시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 채 스스로를 조용히 파괴하는데 동조하고 있다.


나는 매우 직설적이고 확실한 것을 선호해서 내가 만나고 싶으면 상대방의 계획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어린아이가 칭얼대듯 만나자고 졸라댄다. 어떤 정신적 교감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정신적 교감 따위는 애초에 그와 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기에, 그런 정신적 고통과 노동은 원하지도 않고, 그냥 내 두 손이 그의 얼굴을 감쌀 수 있다면 그게 비록 5분이라도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만났고,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원했던 것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행복 혹은 만족했는지 물어보는 그의 메시지는 너무나 시시해서 그것에 대해 답변하지 않았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그의 기억에 남는지 그게 중요했다. 육체적인 뒤엉킴 이외의 그 어떤 정신적 교감도 그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의 눈을 보면 어떨 때는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시선을 피했다. 그 깊고도 큰 눈동자를 바라보면 블랙홀에 기꺼이 빠진 앨리스가 된 느낌이랄까. 하지만 정신은 부여잡았다. 그래서 그런지 아무런 예고 없이 칭얼대서 그를 본 그날 밤 이후 다음날, 내 머릿속에 각인된 그의 얼굴이 조금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가 보고 싶지는 않았는데,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질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에 그때부터 술에 취해 미친 듯 독백을 하 시작했다.


그런 내가 질렸는지 그의 답변 드문 드문 이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나의 주특기, '헷갈림'을 선하는 메시지 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는 이성을 되찾아 미안하다고 했고, 밤에는 다시 술을 마치고 자발적으로 이성을 잃은 채 그를 괴롭히지 시작했다. 취중'진'담이라고 하기에는 거짓말이고, 그냥 술에 취하면 자동적으로 그의 얼굴이 떠올맀다. 결국 내 성화에 못이긴건지 뭔지는 알수 없지만 그는 '내일 잠깐 다시 만나'라고 했다. 그 문자에 나는 뛸뜻이 기뻤지만, 이내 그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고통이 시작되었고, 그게 너무 힘들다. 만나서는 안될 그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고통이란, 그것은 정말 말도 못 하는 인고가 필요한 행위인데, 내가 그걸 하다니. 갑자기 내 자신이 초라해져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만나지 않았고, 그 역시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용기를 내 '잘 가'라고 문자를 보낸 그날 그는 이미 이곳을 떠났다고 그렇게 문자를 보냈다. 나의 폭풍 같은 지금 이 감정은 분명 쓰나미를 몰고 올 테지만 나 자신 전체를 집어삼켜 산산조각을 내어버릴 쓰나미가 지나가면 회복하기 어려운 생채기만 남은채 모두 완전히 다 끝날 것임을 안다. 그 쓰나미를 받아들인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선택권은 온전히 내게 있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재난상황을 받아들이겠다고 선포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나도 알 수 없는 변덕으로 인해 번복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 어떤것도 단정하기 어려운 심히 복잡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날 수도 있다는 이상한 희망을 부여잡고 집착한 요 며칠 내 마음에 구멍이 난 것은 틀림없다. 지금 내가 앉은 소파 뒤로 나랑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현기증을 유발하는데 마치 구름 위에 둥둥 떠있는 이상한 감정을 동시에 주기도 한다. 내 마음에 큰 구멍이 나는 바람에 나의 질량이 줄어들어 공중에 떠있는 느낌이다. 성층권으로 올라가면 결국 터져버릴 것만 같은 지금 상황은 굉장히 위태로운 상태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그의 연락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그에게 작별 선물을 주었고, 나를 보는 대신 향기로 기억해 달라고 그렇게 편지를 남겼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나에 대한 자취를 남기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추한 나의 모습이 기억의 왜곡을 통해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남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당부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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