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알이 빠질 것만 같은 고통을 감내하며 일요일 저녁을 버텼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안압통에 머리가 감전된 것처럼 기능할 수 없었는데, 이름을 알 수 없는 전화번호가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핸드폰의 알림을 받았다.
평소에 의심이 많아서 알 수 없는 번호는 열어보지도 않는데, 발신자의 프로필 사진이 눈에 익어 열어본 메시지는 바로 '그'였다.
오랜만에 자카르타에 잠깐 출장으로 온다며 '내일 저녁에 볼 수 있어?'라는 메시지.
그때부터 머릿속 혈류가 갑자기 급물살을 타듯 정신이 번쩍 들었고, 거짓말처럼 안압통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쿵쾅거림이 내 온몸을 뒤흔들었다. 내 감정은 메말라 비틀어진 지 오래고, 이제 사랑 혹은 로맨스 따위의 단내나는 단어들에 대해 콧방귀 뀌는 냉소적인 인간이 되었는데, 고작 이 메시지 하나에 이렇게 그것도 순식간에 온몸이 호들갑이라니. 이내 내 자신이 참 우스운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 메시지에 답장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3시간이나 고민했다.
이 3시간 동안 그 메시지를 바라보면서 그간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서로에게 끌리는 강렬한 느낌이 있었지만, 상황 그리고 시간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연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나는 정말 너랑 아무것도 할 수 없네.' 농담조로 말하며, 너털웃음을 짓곤 했으니. 그렇게 서로를 잊고 살다가 서로 다른 사람에게 정을 붙여가정을 이루었다.
가끔 나에게 잘 지내냐며 연락을 해왔지만, 나는 그의 메시지 절반 이상을 무시하며 답장도 하지 않았고, 그가 가는 날 잘 가라고 인사 조차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감정이 그를 보면 솟구칠 거 같아서 그리고 그런 충동적인 행위는마치 죄짓는 거라 생각했기에, 그렇게 나는 그를 내 마음속에서 비워냈고, 그의 전화번호도 핸드폰에서 삭제했다.
그렇게 하면 내 감정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그는 행복하게 누군가를 만나 잘 살거라 믿었다.
천일 이상의 시간이 흘러서 당연히 내 머릿속 그의 존재는 희미해졌고, 얼굴도 가물가물거렸는데, 이 메시지를 보자마자 희한한 충격파가 머리를 세게 치며 마치 룰렛처럼 그의 얼굴, 미소, 나와의 시간들이 2배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내가 답장이 없으니, 그의 메시지 창에는 '입력 중'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나도 이제 어린애처럼 굴지말자며, 그에게 '잘 지냈어? 오랜만이다. 내일 그럼 잠깐 차라도 마시자.'라고 보냈다.
그렇게 아무런 예고 없이 그가 메시지를 보낸 그 이틑날우리는 1300일 만에만났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그의 새로운 직업에 대해 설명을 듣고, 그냥 서로 잘 지냈냐며 오랜 친구처럼 그렇게 파고를 힘겹게 삼키고, 서로에게 아주 약간의 물방울도 튀지 말자고 다짐한 듯 2시간을 보냈다. 간간히 전해지는 그의 눈빛은 뭔가 '보고 싶었다.'라는 메시지를 강렬히 전하며 차마 말로는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윤리적인 이유때문에, 그렇게 그 깊은 눈으로 나를 여러차례 바라보았다. 그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에 비친 나의 모습은 행여나 1300일전에 감정이 다시 살아날까 두려워, 모든 힘을 다해 억누르고 있었다. 그런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나는 옅은 미소로 화답했고, 그렇게 우리의 짧은 재회의 시간이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삶을 살아가며, 애를 써도 잊혀지지 않는 누군과와의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자제한다는 조건하에 추억을 공유하는 것이 아름답다고 변명하는 나의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역겨웠다. 그리고, 나도 부인하고 싶은 감정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에 조금은 놀라면서 그래서 '삶이란 만화경 같다고 하는구나.'란 짧은 생각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