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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노 Sep 29. 2020

삶이 힘겨울 때 즈음에

- 안톤 체호프

모든 일이 재미가 없다. 인생에 즐거울 일이 하나도 없다. 그냥 자는 게, 어찌보면 제일 재미있다. 자는 것만이 유일한 안식의 시간이다. 그런데 밤에 잠을 잘 못 잔다. 자야 하는데, 내일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데, 지금 자도 6시간밖에 못 자는데 하는 생각으로 잠을 못 잔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아침이 되어, 휴대폰 알람소리가 들리면 회사에 가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쿵쾅거린다. 어젯밤에 더 일찍 씻고 더 일찍 누울걸 그랬다. 커피를 마시지 말걸 그랬다. 후회가 된다. 수면시간이 부족하면, 하루 종일이 고통스럽다.


고통뿐인 삶 속에서,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되는 것은 먹는 것이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을 때엔, 치킨을 시킨다. 굽네 순살 고추바사삭. 초인종이 울린다. 배달이 왔다. 총알 같은 배달로 치킨이 따듯하다. 고블링 소스를 듬뿍 묻혀 먹는 고추바사삭은 구름 위를 걷는 황홀한 맛이다. 고도를 기다려온 공복감이 천상의 무지개를 만나, 이 세상 모든 색감의 맛으로 변해 내 입안으로 들어온다. 단돈 이만원에, 황홀경에 도달할 수 있다.


3조각이 넘어가면, 상황은 급변한다. 여긴 더 이상, 구름 위가 아니다. 입 짧은 소식가는 아니지만, 치킨이 벌써 물린다. 천상의 황홀한 맛이 아닌, 그냥 평범한 닭고기튀김에 매콤 소스 묻혀 먹는 맛이다. 그 첫 치킨의 맛은 온데간데없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내가 이상한 걸까. 아니면, 원래 치킨이란 이런 것일까.


경제학에서는 이것을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라고 한다. 재화 1 단위당 얻는 효용의 증가분(한계효용)이 점점 줄어드는(체감) 현상을 지칭한다. 목이 마른 상태에서 음료수 한 캔을 마시면, 너무나 시원한 만족감을 느끼지만, 2번째 캔은 그 만족감이 첫 번째보다 떨어진다. 10번째 캔, 20번째 캔은 만족감은커녕, 배가 불러, 고통스러울 것이다. 한 단위 더 소비했을 때 느끼는 효용은 점점 그 크기가 감소한다.


무얼 해도 재미가 없고 즐겁지가 않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사고 싶은 것도 없다. 소망하는 것이 없다. 무엇을 하든,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하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욕구와 충동이 없으며, 동시에 기쁨과 쾌락도 없다. 효용의 증가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내 삶의 모든 한계효용을 이미 소진시켜 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혹시 어렸을 적엔, 즐겁고 행복하게 살았던 것은 아닐까? 그 시절, 누렸던 행복에 감사할 줄 모르고, 한계가 있는 행복들을 이미 다 소진시켜 버리고는 이제 와서, 불평불만만 느려 뜨려 놓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유일한 사명은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뿐이라는 사람들이 있다. 인생의 가치는 삶 전체 쾌락 총량에서 고통의 총량을 공제한 것이라고 한다. 내 인생이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느껴진다. 삶이 힘겹다. 그냥 하루하루를 버텨내며 살아가고 있다. 회사에 너무 가기 싫고, 회사생활이 우울하지만, 먹고살기 위해서 매일 출근을 한다. 인간관계는 좁고, 취미생활은 없으며, 삶의 낙이 없고 하루하루가 괴로움의 연속이다.


방탕하고 비열한 자세로 삶을 살아가는 게 정답이었을까. 온갖 향락을 추구하며, 전과가 생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타인을 착취하고 수탈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것이 옳은 길이었을까. 나는 아둔하고, 나약하며, 대담하지 못했다. 남들처럼 약삭빠르지 못했다. 법과 질서, 도덕 같은 하찮은 것들에 얽매여, 어리석은 삶을 살았었다. 뒤를 돌아보니, 갈림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어쩔 수가 없다. 저 포도는 신포도이다. 저 포도는 시어서 맛이 없을 것이다. 저 길은 옳은 길이 아닐 것이다. 설사 내가 틀렸더라 하더라도, 틀렸음을 인정할 수가 없다. 나의 삶,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삶의 원동력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미 돌아가긴 틀렸다. 맞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 이 길을 계속 걸어가야만 한다.


모든 것이 무서워요. 나는 천성이 심오한 인간이 못 되는지라 저승 세계니 인류의 운명이니 하는 문제에는 별로 흥미가 없어요. 뜬구름 잡는 일에는 도무지 소질이 없다는 얘깁니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진부함이에요. 왜냐하면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내 행동들 중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가려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나를 전율하게 만들어요. 생활환경과 교육이 나를 견고한 거짓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놓았다는 걸 나는 압니다. 내 일생은 자신과 타인을 감쪽같이 속이기 위한 나날의 궁리 속에서 흘러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나는 죽는 순간까지 이런 거짓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무섭습니다. 오늘 나는 무엇인가를 하지만 내일이면 벌써 내가 왜 그 일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게 돼요. 

내 생각에 우리는 아는 것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매일 실수를 저지르고 옳지 못한 짓을 하며 서로 비방하고 남의 일에 끼어드는 겁니다. 사는 데 방해만 되는 불필요하고 시시한 짓거리들에 우리는 자신의 힘을 소진합니다. 이것이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이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으니까요. 친구, 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두렵습니다. 나는 농부들 보기가 두려워요. 무슨 대단하고 고상한 목적이 있기에 저들은 괴로워하는지, 저들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나는 모르겠어요. 만약에 인생의 목적이 쾌락에 있다면 저들은 불필요한 여분의 인간들입니다. 만약에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가난과 절대적인 무지 속에 있는 것이라면 이런 가혹한 심판이 누구를 위해서 필요한 일인지 모르겠어요.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어요.


이 소름 끼치는 이야기는 안톤 체호프의 단편소설 <공포>의 한 구절이다. 시간당 1000원도 벌지 못하면서, 꼭두새벽부터 폐지를 줍는 노인들을 보면, 이와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불쌍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그들은 지금 행복한지,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앞으로의 계획이나 희망 같은 것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사실은 물어보지 않아도 그 답을 알고 있다. 개인적으론, 서로를 모를지라도 인간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한때는 그걸 휴머니즘이라고 불렀던 시절도 있고, 통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요즘은 공감능력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타인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이해하고 있다.


역으로 생각해보기로 한다. 삶의 궁극적 목표는 행복이다. 그 행복에 도달하는 경로는 각자 다르다. 어떤 이는 돈이 행복의 조건이고 어떤 이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행복이다. 어떤 이는 말초신경의 쾌락이 우선이다. 어떤 이는 권력과 명예에 집착하고 어떤 이는 종교나 성취가 곧 행복이다. 종착지를 향해, 각자,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그것이 틀리고 다수와 멀리 떨어진 길이라 할지라도, 뚜벅뚜벅 걸어 나갈 수밖에 없다. 뒤를 돌아보니, 내가 건너온 다리가 끊어져 있다. 돌아갈 수 없다. 과거와 운명을 저주하며, 자기연민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다.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 이제는 앞만 보며,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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