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와 글쓰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는 중

by 임지원

"아리야!"

"삐링~"

"미세먼지 알려줘!"

"현재 OO동 미세먼지는 178 매우 나쁨, 초미세먼지는 36 보통입니다."


"아리야!"

"삐링~"

"미세먼지!"

"현재 OO동 미세먼지는 168 매우 나쁨, 초미세먼지는 39 보통입니다."

"아리야! " "아리야!"

"삐링~"

"미세먼지!"


"1시간 전에도, 30분 전에도, 방금 전에도 대답했는데,

왜 똑같은 질문을 계속하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오늘 운동할 수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려는 건데, 모르겠어?"

"죄송합니다, 적절한 답변을 찾지 못했네요. 저랑 끝말잇기 게임 하실래요?"


4차 산업시대, 이 세상을 바꿀 AI라는데, 내가 경험한 바로는 이 정도의 대화도 불가능하다.

미세먼지를 알려달라는 나의 질문에 우리 집 AI는 흔들림 없이 수치만 알려줬다.

많이 발전하면 이 정도의 대화는 가능하지 않을까? 상상해 봤는데 이것도 쉽지 않을 듯하다.

아무튼 어디선가 큰 바람이 불어와 우리 동네 가득한 미세먼지를 멀리 쫓아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수치는 줄지 않았다. 미세먼지를 향한 원망 때문인지 좀 날카로워졌다.

오전 11시가 지나면서 포기했다. 그래, 오늘은 못 달리겠다.

다행히 마음이 아주 허망하진 않았는데, 그 이유는 지난 주말,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 놓인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사 왔기 때문이다.



뛰는 대신 읽으면 되겠다. 부끄럽지만, 오랜만에! 솔직히 요즘 읽는 게 너무 힘들다. 눈도, 자세도 불편하다. 어려운 책은 돈을 줘도 못 읽겠다. 그나마 이 책은 요즘 내 최고의 관심사인 '달리기'에 대한 글이기도 하고

또 젊은 시절의 나를 사로잡은 작가의 문장이니, 흥미롭게 잘 견디며(?) 읽을 수 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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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올드해 보이는 디자인의 책 표지로 미루어 신간은 아닌 듯했는데, 역시나 그랬다. 신간이 아니어도 그의 책은 여전히 주목받는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코너에 당당히 놓여 있었다. 문단의 아이돌이라 불린 그의 인기를 다시 한번 실감했다. 생각해 보면 그의 에세이를 많이 읽었다. 나 말고도 많이들 그럴 것이다. 어쩌면 이 책 속 담긴 달리기 에피소드 중 여러 개를 이미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 내 앞에 놓인 이 책의 첫 페이지를 설렘과 흥분으로 펼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그건 바로 중년이 된 내가 '달리는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 고작 두 달 정도 뛴 걸 가지고 '달리는 사람' 칭호라니, 내가 봐도 말이 안 되는 거 같긴 한데, 연애도 초반에 설렐 때 제일 정신 못 차리는 거 아닌가? (제가 지금 그래요!)




내가 '착실하게 달린다'고 하는 말은 구체적인 숫자를 들어서 말한다면, 일주일에 60킬로를 달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6일, 하루에 10킬로를 달린다는 것이다. 사실은 일주일에 7일, 매일 10킬로를 달리면 좋겠지만, 비가 오는 날도 있고, 일이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는 날도 있다. 오늘은 피곤하니까 달리고 싶지 않은 날도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미리 일주일에 하루쯤은 '쉬는 날'로 정해놓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60킬로, 한 달에 260킬로라는 숫자가 나에게는 '착실하게 달린다'라고 하는 일단의 기준으로 정할 수 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p21


7월에 310킬로를 달렸다. 이틀 동안 비가 왔고, 여행을 다니느라 뛸 수 없었던 날도 이틀이나 있었다. 그리고 녹초가 될 정도로 더운 날이 며칠인가 계속되었다. 그걸 생각하면 310킬로를 달릴 수 잇었던 건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기록이었다. 결코 나쁘지 않다. 한 달에 260킬로가 '열심히 달린' 것이라고 한다면, 310킬로는 '성실하게 달린' 것이 될 터이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33p




예전이라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문장이다. 나는 참 일관되게 숫자에 무심한 인생을 살고 있다. 그저 달렸구나! 잘 달렸구나! 정도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보다 오히려 그가 사용한 두 개의 부사, '열심히'와 '성실하게'에 꽂혔을 거다. '성실하게'라는 이 심심한 표현을 이렇게 구체화할 수 있다니! 감탄하면서.

하지만 난 달리는 사람이 되었고, 비로소 그의 글에서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기준으로 나의 달리기가 어떤 수준인지 궁금해진 것이다. 달리기가 끝나면 러닝머신 LCD창에 운동 기록이 뜬다. 그때그때 찍어둔 사진을 확인하며 최대한 수학적으로 생각을 해보니 나는 40분 동안 평균 5킬로 정도를 달리고 있다. 그는 하루에 10킬로를 달린다고 했으니, 거리로 따지면 나의 두 배를 달리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는 주 6회를 달리지만 난 최대 주 5회다. 전업주부에겐 '주말특근'이라 불리는 업무가 있다. 난 하루에 5킬로의 거리를 주 5회를 달리는 셈이니 한 달이면 대략 100킬로 정도를 달리는 셈이다. 하루키가 말한 '열심히의 260킬로'와 '성실하게의 310킬로'의 의미가 명확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달려야 보스턴 마라톤대회에도 출전할 수 있구나! 오해는 마시길. 내가 지금 무라카미 하루키를 '달리기'로 이기고 싶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절대 아니다. 그의 '달리기'가 얼마나 치열한 건지 그의 팬이 된 이후 처음으로 이해했고 나아가 창작에 대한 그의 고민과 열정의 깊이를 아주 조금은 엿볼 수 있었다는 의미다.




하와이로 온 이후에도 매일 거르지 않고 계속 달리고 있다.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쉬지 않고 달리는 생활을 다시 시작한 지 이제 곧 두 달 반이 된다. 오늘 아침은 러빙 스푼풀(The Lovin' Spoonful)의 데이드림(Daydream)과 험스 오브 더 러빙 스푼(Hums of The Lovin'Spoonful) 두장의 앨범을 합쳐 녹음한 MD를 워크맨에 넣고 그 음악을 들으면서 1시간 10분 동안 달렸다. 강한 인내심으로 거리를 쌓아가고 있는 시기인 까닭에 지금 당장은 시간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시간을 들려 거리를 뛰어간다. 빨리 달리고 싶다고 느껴지면 나름대로 스피드도 올리지만 설령 속도를 올린다 해도 그 달리는 시간을 짧게 해서 몸이 기분 좋은 상태 그대로 내일까지 유지되도록 힘쓴다. 장편소설을 쓰고 있을 때와 똑같은 요령이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p19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며 설렌 건, 러빙 스푼풀(The Lovin' Spoonful)때문이었다. 러닝화를 신고 달리는 것에 대한 궁금함이 날 헬스장으로 이끈 그날도 이렇게 설렜다. 그 음악을 들으며 달릴 때 어떤 기분이 들까? 스포티파이에서 검색해 들어보니 내 귀에 익숙한 음악이 하나 있다. 'Daydream'이란 곡인데, 광고에서 들었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나마 귀에 익숙하고 느낌이 좋아, 오늘 달리기의 첫곡으로 임명했다. 기존의 내 러닝 음악보다 많이 느린 편인데, 이런 음악을 들으며 달리는 건 어떤 기분일까? 달릴 수는 있나? 궁금했다.














남편을 위해 준비하는 베이컨 치즈 샌드위치를 두 개 만들어, 나도 든든히 먹어두었다. 난 오늘 하루키의 러닝 음악을 들으며 달릴 예정이다! 어쩌면 10킬로에 도전할지도 모른다! 얼음물을 챙기고 반팔과 반바지, 땀을 닦을 수건과 에어팟, 휴대폰을 가방에 담아 헬스장으로 내려갔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이런 설렘, 너무 좋다!


What a day for a daydream

What a day for a daydreamin' boy...


음악이 시작됐고,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조금 달렸는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너무 느려서 도저히 스텝을 맞출 수 없었다. 내 다리가 허공에서 겅중겅중했다. 아주 천천히 달려야 했다. 참고 달리다, 아이고 속 터져! 다시 기존 운동 리스트에 있는 Lady Gaga, Jennifer Lopez, 싸이, Maroon 5, Bruno Mars를 불러냈다. 그리고 하루키 작가님에게 (속으로) 말했다.


"작가님, Lady Gaga 추천합니다. Jennifer Lopez 언니랑 달려보세요, 기가 막혀요!"


빠르고 강렬한 비트의 음악이 시작되자 내 다리에 전기 모터가 달린 듯했다. 신바람이 났다. 팔랑팔랑 설치며 한 시간을 달렸다. 중간에 잠깐 걷기도 했지만 평균 속도가 8.3 kph니 거의 달린 셈이다. 거리는 8.31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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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로는 달리기 시작 이후, 최대 기록이다. 흥분하며 집에 돌아왔다. 집안을 정리하고 잠깐 쉬다가 또 그의 책을 펼쳤는데, 문득 한 문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 아래 본문 중 밑줄 친 부분이다.



오늘 아침은 러빙 스푼풀(The Lovin' Spoonful)의 데이드림(Daydream)과 험스 오브 더 러빙 스푼(Hums of The Lovin'Spoonful) 두장의 앨범을 합쳐 녹음한 MD를 워크맨에 넣고 그 음악을 들으면서 1시간 10분 동안 달렸다. 강한 인내심으로 거리를 쌓아가고 있는 시기인 까닭에 지금 당장은 시간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시간을 들려 거리를 뛰어간다. 빨리 달리고 싶다고 느껴지면 나름대로 스피드도 올리지만 설령 속도를 올린다 해도 그 달리는 시간을 짧게 해서 몸이 기분 좋은 상태 그대로 내일까지 유지되도록 힘쓴다. 장편소설을 쓰고 있을 때와 똑같은 요령이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p19



아! 그 순간 깨달았다. 난 아직 그의 달리기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그는 달리기는 강한 인내심으로 거리를 쌓아가는 것이다. '강한 인내심'. 이 다섯 글자가 내 머릿속에 불꽃쇼를 펼치며 각인됐다. 그리고 그가 달리는 곳이 어딘지를 생각하게 됐다. 그는 대학 캠퍼스의 트랙, 아테네와 보스턴... 한마디로 야외, 한데를 달린다. 안전하게 갇힌 공간이 아니라 땡볕이기도 하고 거친 바람이 불기도 하는 그런 곳이다. 심지어 온몸에 바다 바람과 함께 날아온 소금이 덕지덕지 붙는 걸 참아내며 달리는 것...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을 뒤로하며 그 느린 음악에 몸을 맡기고 강한 인내심으로 천천히 달리는 그를 상상해 봤다. 그의 달리기는 그런 것이구나! 예술혼을 불태우는 구도자의 달리기란 그런 것이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난 내 글쓰기에 일말의(!) 자부심이 있다. 장점도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한다. 읽기 편하고 유쾌하다. (그런 평을 많이 들었다.) 이 정도면 됐지! 가끔 도도한 눈도 떠봤다. 하지만, 그것이 내 한계임을 알기에 자괴감도 들었다. 그런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흉내 내보고 이해하면서 내가 왜 이런 글을 쓰는지, 이런 글 밖에 쓸 수 없는지, 온전히 알게 된 느낌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쓰기와 달리기가 닮아있듯, 나의 글쓰기와 달리기도 닮아있었다. 예술혼을 불태울 강한 인내심은 나라는 인간에겐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갑자기 머리가 시원해졌다. 실수로 찬 공이 골인된 느낌이랄까? 굳이 갈 수 없는 길을 바라보며 우울할 필요가 없다. 애초에 내 길이 아니었다. 이런 게 바로 '돈오(頓悟)'인가? 달리길 정말 잘했다. 누군가는 '정신 승리'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승리는 승리다! 중년엔 마음 다스리는 게 최고의 역량이니까.


*돈오 (頓悟): 점진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단번에 깨달음을 일컫는 불교의 용어. 점진적인 깨달음을 가리치는 점오와 대비된다.






그동안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을 너무 맹목적으로 추종해 왔나?

그에 대한 꽤나 실망스러운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 큰애가 대학에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와 일본]이라는 강의를 듣고 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에 대한 비평도 하는 모양이다. 어느 날 큰 애가 "엄마도 알아야 해." 하며 수업 내용을 전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어쩔 수 없는 일본인이며, 전쟁의 가해자인 일본을 피해자로, 아니면 가해자일지라도 아주 우아하게 그린다는 것이다. 일본 평론가의 저서 [감정화하는 사회(오쓰카 에이지). 2016]에는 일본의 피해자 사관이 명확한 작품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분석한 내용이 있다. [감정화하는 사회]라는 책은 너무 어려워 다 읽지 못했고, 큰 애가 읽으라고 한 부분만 더듬더듬 읽었다는 점을 밝힌다.


KakaoTalk_20230529_080719025.jpg 오른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제작, 왼쪽은 일본 평론가의 저서

이 소설은 갑자기 고등학교 친구들로부터 이유도 모른 채 배제당했던 쓰쿠루가 주인공이다. 그는 친구들을 한 명씩 찾아가서 자신을 배제했던 이유를 듣게 되는데, 밝혀진 이유는 친구 ‘시로’가 쓰쿠루가 자신을 강간했다는 거짓말을 했고, 친구들이 모두 그것을 믿어 그와 더 이상 교류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라는 것. 그런데 시로가 이러한 거짓말을 한 이유는 그녀의 정신상태가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현재 그녀는 망자가 되어 직접 증언할 수 없다. 그리고 소설의 후반부는 그가 친구들에게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 나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쓰쿠루의 순례란 그가 강간 누명을 벗고 무고를 입증하는 여행인 것이다.



‘순례’의 여행을 이렇게 정리한 다음 쓰쿠루를 ‘일본’으로, 시로를 ‘아시아의 종군 위안부’나 근대사 속 ‘아시아에 대한 식민지배’로, 구로를 ‘아사히신문’이나 ‘좌파’로 치환해 보면 어떨까. 한국이 위안부 문제를 규탄하는 것은 오로지 그 나라의 국민성과 피해자 의식 때문이라는 주장은 시로의 위증이 그녀의 정신상태 때문이라는 것과 같은 논리다. 이는 이제 이 나라의 여론이라 해도 될 ‘역사수정주의’ 그 자체가 아닌가. 이 소설은 역사 수정주의에 호의적인 ‘우화’인 셈이다.


[감정화하는 사회(오쓰카 에이지)]p255



우리 집 책장에 이 소설이 꽂혀있고, 책이 나온 년도가 2013년이다. 신간이 아니어도 베스트셀러 코너에 자리를 차지할 만큼 독자층이 두터운 무라카미 하루키다. 그 시절엔 더욱 그랬고, 심지어 1Q84가 나올 땐, 이 책을 문학동네라는 출판사가 출간하게 됐다는 기사까지 읽은 기억이 있다. 당연히 이 소설에 대해서도 세간의 관심은 높았을 거 같은데, 왜 난 이 소설에 대한 비판적 기사를 읽은 기억이 없지? 물론 문화계 전면에서 치열하게 일하던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겠지만, 암튼. 그나저나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 소설을 쓸 때, 우리나라의 위안부 할머니의 정신상태가 온전하지 않다고 생각했을까? 정말 그 끔찍한 일이 일어난 적 없다고 생각했을까? 그가 계란이 바위를 칠 때 계란 편이 되고 싶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오랜 시간 그를 맹목적으로 추앙만 했나? 마음이 심란하다. 세월도 수상하고.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아직 다 읽지 못했다. 이 책의 독후감은 계속될 듯. 아마도.


KakaoTalk_20230528_220522854.jpg 우연이가 그려준 책 읽는 내 모습. (오랜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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