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머싯 몸 '면도날' #사춘기 딸과 요가하기
요가에 점점 몰입하게 되면서 1시간 정도 되는 강습 시간이 점점 짧게 느껴진다.
뎅~ 싱잉볼 소리,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잠시 명상을 하고, 나마스떼 하며 인사를 나눈다.
이후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기도 하지만, 겨울이라 날이 춥다 보니 아예 아쉬탕가 기본 동작 다섯 번을
연거푸 하며 몸의 온도를 확 올린 후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하기도 한다.
일단 몸이 풀리고 후끈 체온이 오르면 얼굴빛이 달라진다. 화장을 했을 때보다 얼굴빛이 더 자연스럽게 환해진다. 숨을 코로 들이마시고, 뱉고, 특정 동작에서 몇 번의 호흡을 하는지 세어보는 것도 점점 재미가 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 두 다리, 특히 허벅지에 힘을 주고, 발가락 중 엄지발가락만 쭉 앞으로 민다.
호흡에 집중하며 1분 버티기. 강사님의 이완 지시에 온몸에 힘을 풀어본다. 예전에는 이완과 함께 몸이 문어처럼 스르르 내려앉는 기분이 이었는데, 요즘은 이완을 했음에도 허리가 아직 꼿꼿하다. 요가를 하면서 내 몸 안에 철사 하나가 생겨난 느낌이 든다. 가느다란 철사 하나가 점점 굵어져 내 몸이 더욱 강하지고, 꼿꼿하게 서고, 또 버틴다. 예전엔 고난도의 어떤 동작을 내가 해낼 수 있나? 언제 할 수 있나?라는 생각 때문에
요가와 가까워지지 못했던 거 같은데, 요즘은 그보다 내 몸의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고 집중하며 성취감을 맛보는 법을 알아간다. 진짜 끝내주는 맛이다. 작은 변화가 오랜 시간 모여 어느 날 갑자기 큰 변화로 이어진다는 걸 조금은 알게 되었다. 시간이 좀 걸리지만 이걸 알면, 지지부진하게 느껴지는 요가 강습도 차츰 견딜 수 있게 될 것이다.
요즘은 막내와 함께 요가를 하고 있다. 긴 겨울방학 덕분에 두 달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고 작년 여름에도 한 달 정도 함께 요가를 했다. 그래도 어쨌든 초보라고 할 수 있는데, 아이라 그런 건지, 유연성을 타고난 건지 어떤 특정한 동작을 너무 쉽게 해내는 바람에 강사님과 함께 수련하는 분들의 놀라운 시선을 받는 일도 생긴다. 예를 들면 일명 코브라 자세가 깊어지며 정수리와 발끝이 닿을락 말락. 초보자에게는 물론이고, 숙련자에게도 어려운 동작이라며 강사님이 신기하다고 사진까지 찍는다.
"어려운 동작인데, 허리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거울로 비친 아이 표정이 재밌다. 어마어마하게 뿌듯한 모양이다. 저렇게 잘해야 기분이 좋은 아이인데,
요즘 푸는 중학교 수학 문제집도, 영어학원 진도도 따라가기도 버거우니 얼마나 짜증이 날까? 얼마나 하기 싫을까? 다음 날 요가강습이 있으면, 잠들 기 전 나에게 "내일 요가 가는 날이다!" 하며 알려주고,
항상은 아니지만 아침에 군소리 없이 일어나 매트까지 챙긴다. 집에서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한 번에 듣는
법이 없는 아이가, 요가 강사님의 지시에 얌전한 강아지처럼 착착 움직이는 모습에서 배신감도 느끼는 중이다. 마지막 사바아사나, 일명 시체자세를 하면서 계단을 내려가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아이가 요가를 즐긴다.
요즘 아침 일찍 일어나 고구마를 직화 냄비에 구우며 책을 읽는다.
고구마의 크기에 맞게 5분, 또는 7분 간격으로 타이머를 맞추고, 타이머가 울릴 때마다 달려가 고구마를 뒤집어 준다. 얼마 전 서머싯 몸(요즘 내가 푹 빠져 있는!)의 장편 소설 '면도날'을 읽었는데, 거기 요가 수행자에 대한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다. 일단 이 소설의 주요 인물 중 래리라는 남자가 있다. 이 남자는 비행기 조종사로 전쟁에 참전을 했다가 전쟁이 끝난 후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전쟁 중 겪은 사건들로 인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방황을 한다. 그는 미국인이고, 먹고 살만큼의 연금도 있다. 그 당시 미국은 경제가 호황(대공항 전)이라 그는 적절한 직장에 취직하고 결혼을 해서 살면 된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삶을 거부하고 인생의 답을 찾기 위해 긴 여행을 떠난다. 이 소설의 화자(아마도 서머싯 몸)는 래리라는 청년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서머싯 몸은 래리라는 청년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그의 소식을 전해 듣기도 하고 직접 듣기도 하면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 속에 많이 늘어놓는데, 그가 인도에서 긴 여행을 하고 돌아온 후 어떤 자리에서 그를 만나게 된다. 서머싯 몸이 그에게 묻는다.
"요가 수행자들이 초자연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데, 정말 그렇던가?" ('면도날' 중)
그의 질문에 래리가 이렇게 대답한다.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인도에선 대부분 그렇게 믿고 있기는 하죠. 하지만 현명한 사람들은 그런 종류의 힘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요. 오히려 정신적 발전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현명한 사람들 중 한 사람으로부터 어떤 수행자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 수행자가 강을 건너려고 하는데 뱃삯이 없었대요. 사공이 돈을 안 내면 배를 못 태워준다고 그러니까, 수행자는 강물 위로 올라서더니 걸어서 건너편까지 갔다는 거예요. 나한테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비웃듯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그런 기적쯤이야 뱃삯 값어치인 1 페니만큼의 가치밖에 안 되는 것이지.'라고 하더군요." ('면도날' 중)
요가 수행자의 초능력이 무려 물 위를 걷는 것이란다! 너무 재밌어서 탄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남편이 안방 문을 열고 나오며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곧 타이머가 울리고 나는 직화 냄비로 달려가 고구마를 뒤집었다. 나에게 초능력이 필요하다. 여기서 책을 읽으며 눈빛으로 직화 냄비 속 고구마를 뒤집을 있는 초.능.력. 얼마나 더 요가를 하면 이런 초능력이 생길까? 고구마가 다 구워지자, 남편이 먼저 식탁에 앉았고, 잠든 아이들도 눈을 비비며 일어나 식탁으로 온다. 나는 서머싯 몸이 인도, 요가, 수행 이런 것에 관심이 있었던 거 같다며 아침에 읽은 소설 '면도날' 이야기를 꺼냈다. 물 위를 걷는 요가 수행자의 초능력 얘기에 남편은 관심이 없었지만,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요가를 시작한 큰 애는 엄청 공감을 하며,
요가하는 사람의 몸은 아우라가 다르다고 거듭 요가 찬양이다.
막내와 함께 조금 일찍 요가강습실에 도착했는데, 강사님이 벌써 나와 싱잉볼 옆에서 몸을 풀고 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아침에 읽은 소설 '면도날'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그 요가 수행자가 물 위를 걸어서 건너편까지 걸어갔데요! 하자 강사님이 깔깔 웃는다.
너무너무 재밌다고 하신다. 혹시 다른 곳에서 강습하시게 될 때 재밌는 에피소드로 사용하시라고 사진으로
찍은 책 속 해당 페이지도 보내드렸다. 그리고 우리도 열심히 수련해서 물 위도 걷고, 하늘도 날자고 했다.
다 같이 매트에 앉아 명상을 시작한다.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허리를 세우고, 어깨를 뒤로 아래로 내린다.
코로 들어오는 공기가 시원하다. 내 몸이 풍선처럼 부푼다. 들어온 숨이 나가면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앞으로 한 시간 몸에 집중하면서 내 몸 안의 철근이 더 단단해지는 걸 느낄 것이다.
나는 요가 수행자, 초능력을 수련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