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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원 Mar 30. 2024

꿀잠을 향한 긴 여정

#불면증 #민음사세계문학전집 #독후감 #중년

 잠이 안 온다. 자려고 누우면 잘 수 있을까? 하는 생각부터 드는 요즘이다.

낮에 생각 없이 마신 커피 한잔을 원망도 해보고, 낮잠도 후회한다.

시간은 꽤 지났지만 아직 새벽은 아닌 거 같다. 몇 시쯤 됐는지는 모르겠다.

방 안은 컴컴하고, 이불은 더없이 묵직하다. 베개도 완벽하다. 옆에 누운 남편은 일정한 숨소리를 내며

새근새근 자고 있다. 저렇게 잘자면서 아침에 내가 잠을 못 잤다고 속상해하면 자기도 잠을 못 잤다고

숟가락을 얹는다. 나이 드는 게 죄도 아니고, 사람한테 이럴 수가 있나 싶다.

아침에 요가할 때 가끔 이런 스몰 토크를 나눈다.


"OO님, 지난밤 꼴딱 세셨데요."

"아... 어떡해요. "      


10대에 밤을 꼴딱 세면 시험기간 중, 20대에 밤을 꼴딱 새웠다고 하면 업무가 많았나?

30대에 밤을 꼴딱 새웠다고 하면 아이가 아파 육아가 고됐나? 40대엔 글쎄... 난 그때도 늦둥이 막내 육아 때문에 그랬지만 대부분은 자녀입시가 원인일 것이다. 늦은 밤 도서관에서 아이를 데려오는 일 같은 걸 해줘야 하니까. 하지만 50대가 모이면, 밤을 꼴딱 새웠다는 말에 일제히 동병상련의 깊은 한숨과 함께

"아... 어떡해요."


이번 주 초에 연 이틀 잠을 못 자고 아침을 맞았다.

침대에서 일어나자 오늘 밤은 반드시 자고 말겠다는 생각 말곤 아무 생각도 안 든다.

커피를 내리는 대신, 우유 한잔을 따듯하게 데웠다. 식탁으로 온 남편이 내 우유를 보고 빵 터진다.

"엄마 어제 잠 못 잤나 보다, 아침부터 우유를 데워 마신다."

학교 갈 궁리에 마음이 바쁜 막내는 나한테 관심도 없다.


아침 요가를 열심히 하고, 명상을 할 땐 호흡에 집중하며 마음속에 강렬하게 자리 잡은 불면의 억울함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잠을 향한 갈망이 집착으로 이어지면 안 되니까, 오늘 밤 성공적인 잠에 이르기 위해서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실내 자전거를 40분,

거리로는 8km 정도 돌렸다. 유튜브를 틀어놓고 돌렸는데, 생각보다 재밌어서 예상보다 훨씬 많이 돌리게 됐다. 하체 근육이 뻐근하다. 이마에 땀도 송골송골. 러닝머신 러닝만큼 확실한 성취감을 주는 운동은 아니지만, 요즘 열과 성을 다해 매진하고 있는 나만의 스포츠다. 'TV로 저녁 뉴스를 보거나, 좋아하는 유튜브를 볼 땐

무조건 돌린다'가 나만의 원칙이라면 원칙이다. 자전거에서 내려와 스트레칭을 하니 소파에 누워 딱 한 시간만 자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낮잠은 불면의 원인 중 하나다. 오늘 밤까지 잠을 못 잔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나는 벌떡 일어나 창 밖을 바라봤다.


"어머나, 날이 왜 이렇게 좋은 거야?"

 

멀끔한 해가 하늘 한가운데 둥실 떠올라 온 동네를 따스하게 비추고 있다.

나는 밖으로 나가 일광욕 겸 산책을 하기로 했다. 나간 김에 단골빵집에 가서 점심에 먹을 샌드위치를

사가지고 와야지 마음먹었다. 지난밤 불면에 대한 억울함이 점점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포근한 봄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노란 개나리가 미소 짓고 있다. 우리 동네 공식 가로수인 벚꽃은

아직 준비 중이다. 벚꽃이 핀 봄밤 산책이 벌써 기대가 된다. 남편이랑 함께 내 말에 대꾸를 하네마네

투닥거리며 그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꽃향기를 맡을 것이다. 어색하게 셀카도 찍고,

자식 다 소용없고 결국 우리 둘 뿐이야, 뻔한 대화를 나누겠지만. 그래도 기대가 된다.     


빵을 사서 집으로 오는 길, 문득 동네 도서관 앞에 있는 작은 동산이 눈에 띈다.

막내 어릴 때 도서관 데리고 다닐 땐 이 동산을 꼭 지나쳤는데, 요즘은 그럴 일이 없었다.

아직은 겨울숲처럼 앙상한 나무들이 보이는데, 그 사이로 황토 오솔길이 놓여 있다.  

황톳길이 생긴 우리 동네 동산


나도 모르게 그 길로 접어들어 걸었다. 매끈한 황톳길이다. 이거 요즘 유행하는 맨발 걷기 그런 용도로

관공서에서 만든 건가? 싶어 일단 멈췄다. 신발을 신은 채 산책하는 주민이 보인다. 괜찮은 거 같다.

기분 좋게 걷고 있는데, 나보다 연배가 있어 보이는 중년여성분이 맨발로 걷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나도 신발을 벗고 싶다는 생각에 강렬하게 사로잡혔다.

무엇보다 오늘 밤 나의 꿀잠에 분명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 하지만 주머니에 작은 수건이나 휴지조각도

없는데, 여기서 신발을 벗고 땅을 밟고, 다시 이 신발을 신으면 신발 속은 어떻게 되는 거지? 답이 없는 생각을 잠깐 하는 중에 나는 벌써 신발을 벗고 황톳길에 서 있다.

        


두려움반 호기심반 사뿐사뿐 고양이처럼 걷고 있는데, 아까 맨발로 걷던 그 중년 여성분이 나를 향해 걸어온다.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쳤다. 내가 미소를 짓자, 그분도 날 보고 웃으신다.


"아까 맨발로 걸으시는 거 보고 저도..."

"너무 좋죠?"

"네, 시원하고 매끈매끈하고... 정말 상쾌해요!"


갑작스럽게 만난 그분과 함께 몇 바퀴 더 걸으며

여러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 동산에 길을 넓히고 청소를 하고 바닥을 단단하고 매끈하게 만든 건 관공서가 아니라 이 동네 사시는 남자분인데, 암투병 중이시란다. 다행히도 이 길을 만들고 맨발로 걸으며 건강이 많이 좋아지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황톳길 걷는 걸 '접지'라고 하는데, 몸 안에 나쁜 것이 땅을 통해 빠져나가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나와 걷는 내내 길에 널린 나뭇가지나 돌 같은 걸 길밖으로 내던진다. 누군가의 안전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분들이 많다. 감사한 마음으로 걸으며 종종 와서 걷기로 마음먹고, 길을 만든 암 환자분의 쾌유를 빌었다. 발을 씻을 수 있는 수돗가를 알려주셔서 함께 걸어가 발을 씻고, 그분이 건네는 휴지 몇 장으로 발을 닦았다.  


집에 돌아와 카페인이 없는 루이보스티 차를 우려 베이글 샌드위치를 먹으니 오늘 밤 정말 꿀잠을 잘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 오후 1시밖에 안 됐다는 거다. 큰 일이다. 소파에 누워 딱 한 시간만 자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너무 자고 싶다!!! 아니 아니 아니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안방 커튼을 빨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해가 좋으니 커튼 빨기 딱 좋은 날인 것이다. 세탁기에 커튼을 넣고 기다리며 역시 꿀잠에 효험이 있는 독서를 시작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고양이 눈'이다. 한동안 서머싯 몸에 빠져있었는데, 요즘은 할머니 작가님 소설에 빠져 있다. 도리스레싱과 마거릿 애트우드.


도리스 레싱은 '다섯째 아이'도 충격적이었는데, 최근에 읽은 '풀잎은 노래한다.' 이 작품은 너무 강렬해서

몇 번 독후감을 쓰려고 끄적대다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비혼, 저출산 문제로 우리 사회가 이렇게 시끄러운데...  섣불리 결혼하고 끝내 불행하다가 결국 미쳐, 살해당한 여자 이야기에 대해 뭐라고 써야 하나? 내 결혼은 뭐 그리 순탄했나? 어쨌거나 극과 극은 통한다고, 끔찍한 극단을 통해 나는 반대편의 차분한 극에 잠시 머물 수 있었다. '풀잎은 노래한다'를 읽는 동안 막내의 사춘기 난동을 진압(?)하는 과정이 다른 때보다 차분할 수 있었으니까. 정말 다행이었다. 읽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든다. 여성이 결혼을 하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

그냥 산다고 되는 건 아니구나,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는 일이구나.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고양이 눈'은 읽는 중인데, 빠져들고 있다. 주인공은 50대 여성이고,

그녀에겐 두 딸이 있다. 공감되는 포인트다. 그리고 불쑥 만나는 재기 발랄한 문장들이 딱 내 취향이다.

나를 처음 웃게 한 문장은 바로


'친구들을, 여자인 친구들을 사귀고 싶다. 여자 친구들, 책에서 읽은 적이 있기 때문에 여자 친구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한 장소에 오래 산 적이 없기 때문에 내게는 여자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424. '고양이 눈 1' 중


여자 친구가 뭔지도 몰랐던 이 소녀는 아주 영악하고 못된 여자 친구들로부터 엄청난 괴롭힘을 당한다.

그리고 두 딸의 엄마가 된다.  


'내 두 딸은 "그래서요?"라고 되받아치던 시기를 거쳐갔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죠?"라는 의미다. 첫째가 열두 살인가 열세 살이 되던 즈음이었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 나를, 자기들 친구를, 서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서?  나는 말하곤 했다. "그러지 마. 미칠 것 같아"

"그래서요?" '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424. '고양이 눈 2' 중


그렇다! 사춘기 딸은 엄마를 미치게 한다.

익숙한 멜로디가 들러온다. 세탁이 끝났다는 걸 알려주는 바로 그 멜로디. 드디어 커튼 빨래가 끝난 것이다. 나는 얼른 책을 덮고 젖은 커튼을 해가 드는 베란다로 가져가 천정에 붙은 빨래 건조대에 널었다.

어느 정도만 건조가 되면, 나머지는 다리미로 다려 커튼 고리에 달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다림질은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점점 나의 꿀잠 시간은 다가오고 있다!)

저녁 뉴스를 시청하면서 하면 될 것이다. 깨끗하게 빨아 잘 다른 커튼을 달고, 침대에 누워 그 커튼을

바라보면 그놈의 꿀잠이 절로 들 것이다!  그런데 시계를 보니 고작 4시다. 너무너무 자고 싶다. 차라리 지금이 밤이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욕실 청소를 하기로 마음먹고, 고무장갑을 끼고 수세미를 집어 들었다.

 

이 무슨 고행인가? 난 단지 오늘 밤 꿀잠을 자고 싶을 뿐이다.

과연 잘 수 있을까? 어젯밤처럼 정신이 점점 또렷해지면 어떡하지?

이상하다. 잠들고 싶다는 마음과 정신의 또렷함이 같이 강렬해진다.

마음속에 불안과 기대가 교차한다. 샤워부스의 유리까지 투명하게 닦고 나니 상쾌하다.

과정이 고된 만큼 나는 깊은 꿀잠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현관문이 열리며 막내가 들어온다.

아이 얼굴을 보니 갑자기 부러운 마음이 든다. 오늘 아침 아이를 깨우던 그 순간이 떠오른다.

아이는 저 심연같이 깊은 잠 속에 빠져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깨우자 절대 나오지  않겠다고 아이는 허우적 댔다. 나는 그런 아이를 억지로 끄집어낸다.

처음엔 뽀뽀도 하지만, 결국은 소리를 꽥 지른다.  


"빨리 안 일어나!!!"  


도대체 그 느낌은 어떤 걸까? 너무너무 궁금하다. 나도 저 나이 땐 그런 잠을 잤을 텐데...

오늘 밤엔 잘 수 있을까? 벌써 눈꺼풀이 내려온다. 다림질까지 하고 나면 정말 뻗어버릴 것이다.

저녁을 다 먹고, 계획대로 뉴스를 보며 다림질을 하고 커튼까지 달고 나니 남편이 들어온다.

오늘 하루 꿀잠을 향한 나의 긴 여정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남편이 재밌다고 껄껄 웃는다.

드디어 11시.


막내는 영어학원 숙제를 하느라 잠들지 못하고 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남편에게 먼저 안녕을 고했다.

평소라면 남편이 나에게 먼저 안녕을 고하며 안방으로 들어가고 난 아이가 숙제를 마치길 기다리고 방에 불을 꺼주고 주부로서 욕실의 후드, 가스 밸브 그런 게 꺼졌는지를 확인하고 가장 늦게 잠들지만,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충분하고 넘친다.

 

오빠, 나 드디어 꿀잠 자러 가.


"그래, 잘 자! 우리 지원이."     


그렇게 딱 하루 꿀잠을 자고, 금요일 밤은 또 설치고 말았다.  

꿀잠을 향한 나의 긴 여정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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