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커뮤니티 오전 요가반 풍경
나는 왜 요가를 쉰이 넘어 시작했을까? 아니, 어쩌다 나는 이 좋은 요가를 모르고
쉰이 됐을까? 요즘 많이 하는 생각 중 하나다.
바람직한 생각이 아니란 건 안다.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후회일 뿐이다.
그래도 어떡하나? 자꾸만 그 생각이 찾아오는 걸.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돌아갈 수 없는 젊음이 찬란했던 수많은 어느 날... 그 분주했던 시간 속에서
일주일에 두 시간? 어쩌면 단 한 시간이라도 요가를 하며 분주한 머리를 비우고
몸에 집중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십 대의 날 괴롭힌 건 '불안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남다르게 거대한 나의 하체'였다.
예쁜 옷을 좋아하는데, 입을 수 없다는 절망감! 너무너무 속상했다. 지금까지 좋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한 지인이 오래전 나에게 했던 말이 있다.
"지원아, 넌 바지보다는 치마가 어울려!"
여기서 치마는 H라인 스커트가 아니라 A라인 플레어스커트다.
그래도 여성스럽게 보이는 작은 어깨와 웃을 때 올라가는 입꼬리, 그리고 가지런한 치아가
내 마음에 들어 다행이었다. 물론 그 시절의 날 '패셔니스타'라거나, '예뻤다'로 기억할 사람은 없겠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멋지려고 애쓰며 이십 대를 살았다. 하지만 여기에 '요가'라는 변수가
들어왔다고 가정해 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나는 요가를 만나고 1년 만에 비로소 66 사이즈의 바지를 입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저렇게 옷을 입는 방법이 다양해진 느낌이다.
66 사이즈의 청바지와 H라인 스커트를 입을 수 있는 이십 대란 어떤 걸까?
내가 그런 이십 대를 보냈다면 어땠을까? 아쉽다 정말...
이제 '거대한 하체' 다음으로 20대의 날 괴롭힌 '불안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이 문제에서도 요가는 확실히 변수다. 나의 첫 직장은 방송국, 방송작가가 나의 첫 직업이다.
한때는 방송작가라는 직업에 환상도 있었지만, 지금은 불안한 고용환경과 열정페이를 대변하는 대표 직업군으로 알려진 듯하다. 생각해 보면 늘 마음이 힘들었다. 나는 왜 재밌는 아이디어를 내지 못하나? 나는 왜 기가 막힌 원고를 쓰지 못하나? 프로그램이 없어지면 어떡하나? 담당 PD가 바뀌는데... 바뀐 PD가 데리고 다니는 작가군은 따로 있는데, 나는 어떡해? 갑자기 잘리면 어떡하지? 등등등... 할머니의 새벽기도 덕분이었는지 다행히 안 잘리고 오래 버텼다. 이렇게 버틸 줄 알았다면 마음이라도 편하게 일했을 텐데, 그러질 못했다.
그러니까 그때 요가를 했다면 내 마음이 좀 편안했을 거 같단 말이다! 가만히 앉아 호흡하고, 소소한 요가 동작부터 챌린지 동작까지 내 몸에 집중하고 성취감을 맛봤다면 이런저런 불안에서 멀어졌을지 모른다. 그리고 요즘 핫한 명상, 이 명상이 창의성과 그렇게 밀접하다는데, 그때 내가 요가를 하고 명상까지 했다면 너무너무 재밌어서 깔깔 웃다가 기절초풍할 아이디어를 빵빵 터트렸을 것 같단 말이다. 물론 꼭! 그렇게 됐을 거라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얼마 전, 어깨가 드러나는 탑 형태의 상의를 입고 요가 강습에 갔다.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바닥에 요가매트를 까는데
"역시 젊어!"
최근에 우리 오전 요가반에 합류해 열정을 불사르고 있는 왕언니다.
오전 9시, 강습 시간에 늦으시는 법도 없고, 늘 나보다 먼저 오셔서 깔끔한 모습으로 앉아 계신다.
백발과 흑발은 그레이 헤어로 완성돼, 깔끔한 단발이다. 화려한 곡선으로 그린 검은 눈썹과 붉은 입술
피부톤까지 확실하게 풀메이크업. 눈빛은 날카롭고, 몸은 매우 날렵한 데다가 선호하는 요가복은
블랙이라 남다르게 깐깐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상견례 자리에서 시어머니로 만났다면 바로 눈을 깔았을 거
같은 느낌.
"젊긴요!! 날이 더워서 그냥..."
왠지 모르게 방어적인 한 마디가 툭 튀어나오고 말았다. 사실 툭 튀어나온 뱃살과 드러난 어깨 때문에
부끄러웠고, 젊다는 말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사실 벌써 몇 년째 나는 '중년'에 집중하고 있지 않나!
바로 명상이 시작되고 잠시 고요하게 앉아 있는데,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다.
명상이 끝나자마자
"아까는 실수한 거 같아요. 그냥 맞아요 하면 됐는데... 죄송해요."
다행히 왕언니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주셨다. 자수를 하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지고, 비로소 시작된
강사님과 나 그리고 왕언니 셋만의 요가 수업이 왠지 더 화기애애하게 느껴졌다.
왕언니는 몸이 유연하고 날렵해 나는 못하는 어려운 동작을 척척 해내지만, 나이 탓인지 근력이 부족해
버티는 동작을 버거워하신다. 강사님이 걱정하며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시라 하니, 왕언니는 그런 소리 말라며
지금 부족한 근력을 보강하기 위해 따로 헬스 PT까지 받고 있다고 하신다. 요가를 잘하기 위해 PT까지 받다니... 왜 이렇게까지 하시나 궁금했는데, 그녀에겐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언니는 그동안 열심히 일해 많은 자산을 일궜고, 이젠 그걸 쓰면서 자신의 행복과 건강을 위해 최선을
다할 계획이라고 했다. 찬찬히 보니 언니의 손이 비범하다. 일을 많이 한 손이다. 관절이 다 휘었다며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듯 보여주셨다. 그리고 목에는 굵은 금목걸이가 걸려 있고, 요가복 위에 걸친 가벼운 코트도
소재가 좋아 보인다. 신발은 편안한 니트 소재인데, 빛나는 큐빅들이 우르르 박혀 있다. 비싸 보인다!
심지어 요가 후 티타임을 제안하고, 그 비용을 모두 결제하셨다. 화덕피자도 사주시고, 베이커리 카페에서 먹고 싶은 빵을 모두 고르라는 리치(rich)한 왕언니의 진정한 스웨그를 뽐냈다. 특별히 수련이 고된 날은 이런 말도 하신다.
"우리 공주들, 고생했네."
여기서 공주는 나와 우리 요가반 에이스, 초등학생 남매를 예쁘게 키우고 있는 젊은 엄마다.
쉰이 넘어 공주 소리를 들으니 웃음이 나온다. 그동안 중년이라고 징징대며, 가는 세월이 아쉽네,
몸이 예전 같지 않네, 후회와 짜증을 아무 때나 남발하며 지낸 것도 부끄러워진다.
생각할수록 쉰, 그렇게 늦은 나이는 아니다. 심지어 나는 공주라 불린다!
이십 대에 거대한 하체를 부끄러워하며 이런저런 불안에 휘둘린 시간도 모두 나의 빛나는 스펙이라 생각하기로 마음먹는다. 코로 깊은숨을 들이마신다. 천천히 내뱉는다.
오늘 하루,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성실하게 채워나갈 수 있을 거 같다.
생각할수록 우리 요가반의 왕언니...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