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면 벚꽃구경, 여름엔 여름휴가, 가을엔 단풍구경, 겨울엔 크리스마스여행이나 신년맞이 해돋이 여행 등등... 참 이름도 목적도 다양하다.
이런 때만 되면 방송에서도 날이면 날마다 시끄럽게 떠들어 대니 도무지 모르려야 모를 수도 없다. 이 소란 속에 어디도 가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은 마음먹은 대로 훌훌 여행을 떠나는 그들이 마냥 부럽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나의 처지를 느끼며 루저인양 의기소침해지고 기분도 다운되기도 했었다.
여행을 떠날 수 없는 이유는 많다. 매일 돌아가는 루틴이 있는데 어딜 자리를 비우고 싸돌아 다닌단 말인가.
휴가 때도 아닌데 며칠씩 여행을 하기도 곤란하고, 당일치기 여행은 오고 가고 차만 타다 피곤에 절어 돌아오기 십상이다. 너무 비효율적이다. 이래도 굳이 떠날 필요가 있어?
떠나는 대신 봄가을엔 아파트 단지나 천변의 벚꽃구경, 단풍 구경으로 각종 꽃놀이를 대신해 왔고 "차막힐 땐 어디 가는 거 아니다" 주의로 살아왔기에 모두들 몰려 나가는 여행철이나 무슨 이름 있는 날(어린이날, 크리스마스 등등)에는 반드시 칩거나 반대로 움직이는 것을 선호해 왔다. 아이들 방학 때도 마찬가지다. 체험학습을 쓰고 학기 중에 놀러 가고 방학중엔 집 지키는 망부석이 된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게 살기로 했단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자면 끝이 없다. 그러니 됐고, 일단 떠나자!
실은 주말에 친정집에서 김장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전엔 김치만 택배로 받아먹곤 했다. 식구들이 거의 김치를 먹지 않으므로 우리 집은 사실상 김장이 별 필요가 없다. 김치 한통이면 일 년을 먹으니.
하지만 늙은 부모님이 김장 300 포기를 하실 것을 생각하니 올해는 가서 도와드리고 싶었다. 같이 일하고, 맛있는 수육도 해 먹고 즐거운 김장 잔치를 해볼 참이었다. 거기에 나의 욕심을 더해 언니와 함께 단풍구경 1박을 추가해 넣었다.
언니는 멀리 대구에 살아서 명절이나 특별한 대소사 때가 아니면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이렇게 만날 생각을 하니 좋았다. 자매는 특별한 목적이 없이 만나도, 굳이 특별한 것을 같이 하지 않아도 수다와 함께 얼마든지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게 참 좋다. 언니와 대구에서 만나 합류 후, 그때그때 마음이 가는 대로 일정을 조정해 가며 나들이를 다니기로 했다.
예정된 일정은 총 3박 4일. 전 같으면 가족들 생각에 시도하지 않았겠지만 이번엔 그냥 그렇게 하기로 했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각자의 삶을 잘 살라는 당부와 함께 나는 나의 여행을 떠났다.
가고 싶은 곳이나 하고 싶은 것을 대충 생각해 두기는 했다. 가을 산사에도 가고 싶고, 같이 쇼핑도 가고 싶고, 대구에 새로 문을 열었다는 <간송 미술관>도 가보고 싶었다. 한적하고 탁 트인 카페에서 멍 때리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기도 했다.
일단 우리는 통도사에 가기로 했다. 한국의 3대 사찰(해인사, 통도사, 송광사)로 유명한 세 곳의 절에 가보자고 예전부터 누누이 말은 해왔었다. 수박 겉핥기식으로라도 해인사는 다녀왔으니 이번엔 통도사. 또한 단풍구경도 하고 가을의 정취를 제대로 느끼려면 산만한 곳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상과는 다르게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많아 통도사 내 어디든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도 불구하고 가을의 산사는 충분히 넓었고 가을의 정취가 있었다. 조용하면 조용한 대로 붐비면 붐비는 대로 그 나름의 멋이 있어 좋을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들이를 나왔고, 기분인 하늘로 치솟는 중이라 어딜가든 무엇을 보든 당연한 일이었다.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 나지만 왠지 절에 가면 마음이 편하고 차분해져서 그곳에서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지금까지는 주로 수덕사나 동화사 위주로 일 년에 한두 번 가곤 했는데, 나들이 삼아 온 통도사는 그렇게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방문한 곳의 주인을 찾아 인사하듯 대웅전으로 먼저 가 절을 하고 잠시 앉아 명상의 시간을 가진 후, 경내를 돌아볼 때였다. 운 좋게도 마침 금강계단에 들어갈 수 있어서 그곳에 들어서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을 돌며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다.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고 차분해지면서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그곳은 참 신기한 기운을 가진 듯 느껴졌다. 탑을 돌며 평소 아이들에게 '너희들 키우느라 엄마 몸에 사리가 다 생기겠다'는 둥의 말을 남발하곤 했던 나 자신이 떠올라 급하게 반성도했다. '사리'는 그런 식으로 쓰이는 단어가 아닌데 너무나 불경스럽고 어리석은 나는 잘도 나불거려왔던 것이다.
통도사의 전각들은 여느 절처럼 화려한 색감이 아닌 총 천연 나무색들이었다. 오랜 시간을 지내오면서 자연스럽게 닳고 바래진 옅은 나무색들의 전각은 영축산의 단풍 색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 더 아름다웠다. 가까이에서 전각을 자세히 봐도 멋지지만 멀리서 자연 속에 파묻힌 통도사의 모습도 장관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여유로운 넓은 통도사는 무엇이든 가득가득 풍요로워 보이는 절이었다. 사람으로 치면 되게 인심도 좋고 마음도 넓고 착해서 다른 이가 아무리 죄를 짓고 불경스러운 언행을 일삼아도 과격하게 때리거나 윽박지르지 않고, 살살 달래 가며 보듬어 가르쳐 줄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 외에도 경내에 있는 석탑들과 조형물, 연못, 전각 안팎의 불화나 탱화들도 대단히 흥미로웠다. 이곳저곳을 충분히 구경하고 쇼핑도 한 다음, 다음 장소를 물색했다.
우리는 암자에 가보기로 했다. 여러 사찰들을 다녀봤지만 암자가 있는 절도 드물었고, 암자가 있다고 해도 등산을 해야 하는 험한 길이라 가볼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하지만 통도사에는 19개의 암자가 있고 모두 차로 이동이 가능하다고 하니 가보기로 했다. 나의 '첫 암자 방문'! 참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두근 했다.
그중, 언니의 추천으로 <자장암> <극락암> <서운암>에 가보기로 했다.
자장암
아기자기하게 예쁘게 꾸며진 정원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힘든 줄도 모르고 암자에 다다르게 된다. 이렇게 예쁜 곳에서 어떻게 수행을 했을까 싶을 만큼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천천히 걷게되고, 다른 계절엔 어떤 모습일지 너무 궁금해지는 자장암.
전각이 한 두 채 정도 있는 아주 작은 암자였는데 이곳은 <금와보살>이 유명했다. 전각과 마애불 사이로 난 작은 길을 통과해 들어가면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 작은 구멍이 나있고 그 안에 금 개구리 보살, <금와보살>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누구나 볼 수는 없다고.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QR코드를 안내해 주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줄을 서서 기다려 작은 구멍 안을 눈 부릅뜨고 봤는데, 와! 대박! 난 보았다. 내가 본 것이 금와보살이 맞는지 QR코드를 찍어 확인해 보니 역시나 맞았다. 아무나 볼 수 없다던데 와우! 럭키비키!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건 '금요일인데 로또 사라는 신의 계시가 아닐까'하는 매우 세속적인 생각이었다. 정신 차리자마자 급 자괴감이 들었다. 아.. 나란 인간....
극락암
극락암은 사계절 풍광이 아름답다.
봄의 극락영지 벚나무
여름의 영월루 바람과 달빛
가을의 삼소굴 감나무
겨울의 단하각 대숲과 솔숲
......
(극락암 4경)
극락암은 경내 입구에 있는 설명에 나와 있듯 사계절이 아름다운 암자라고 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보이는 극락지연과 홍교는 주변 풍경과 더불어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대단히 멋스러운 장소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은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는 엄청난 포토 스폿이었다.
줄도 설겸, 쉴 겸 앉아서 사람들은 관찰하니 나이대별로 사진 찍는 포즈가 대단히 달랐다. 대체로 중년들은 아이돌 칼군무 하듯 동작하다 딱 멈춰서 동적인 모습 그대로를 코믹하게 사진으로 담았고, 젊은이들은 분위기에 심취한 매우 정적인 사진을 진지하게 남기곤 했다. 뭐, 닭살 돋는 코믹 포즈를 즐기는 커플도 없진 않았다. 다른 암자들보다 젊은이 커플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데이트코스로도 소문난 암자인 듯했다.
계속 더 돌아다니다가는 이대로 진짜 극락 갈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당이 떨어져 갈 때, 보살님들이 먹거리를 파는 곳을 발견했다. 된장 종류들도 팔고 강정도 팔고 계셨다. 무료로 커피를 나눠주시고 맛보기 강정을 나눠주시는데 커피는 패스하고 굉장히 순박하게 생긴 강정을 받았다. 이게 무슨 맛이 있을까 싶게 생긴 건 별로였는데 먹는 순간 와! 세상에 이렇게 고급진 맛이 없었다.
사실 강정은 매우 위험한 음식 중 하나이다. 옛날에 오꼬시(?) 좀 먹어본 분들은 다 알 것이다. 튀겨서 엿을 부어 뭉쳐낸 덩어리가 대단한 속 쓰림을 유발한다는 것을. 그런데 이 강정은 곡물을 튀기지도 않고 구워서 만들었고(튀김은 이 나이 쯤 되면 소화가 안된다), 엿으로 붙인 것도 아닌데, 딱 각맞춘 듯한 예쁜 모양으로 부드럽게 바삭거리기도 하고 은은하게 달콤하기까지 했다. 두말할 것 없이 강정을 한 보따리 구입했다. 이 강정은 여행 내내 든든한 나의 동반자가 되었다.
서운암
대단한 장독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놓인 것을 보고 지나면서 한번 놀라고, 올라간 곳의 자연경관에 다시 또 놀라게 되는 서운암. 이곳의 백미는 넓은 뒤뜰을 둘러싸고 펼쳐진 파노라마 '영축산 뷰'이다.
돗자리 깔고 앉아 한없이 마냥 둘러보기만 해도 좋을 만큼 어딜 봐도 눈호강을 넘어서 눈 호사를 제대로 할 수 있는 풍경들이었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압도 당한다는 느낌이 바로 이런게 아닐까 싶었다.
넓은 뜰 한쪽 바닥에 <나전 옻칠 반구대 암각화>는 아래위로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면서 보고 또 보고 할 만큼 신기하고 멋있는 그림이었다. 그 위로 잔잔하게 흐르는 물로 신기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사람들의 소원을 담은 소원 기와와 소원 초들의 공간이 있었다. 다가가 사람들의 소원들을 읽어보는 재미는 쏠쏠 했다. 또 때가 때인지라 다수의 소원은 '절대합격!'이었다.
"아무개, oo대학교 ooo학과 절대 합격!" 이 정도로 구체적인 소원이 소원초에 실려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짠한 우리 수험생들. 남일 같지 않다.
우리도 조카의 '절대합격' 소원초와 우리 집의 '절대평화' 소원초를 그들 사이에 세워두고 돌아섰다.
마음이 든든하고 편한 기분이 드는 건 아마도 기분 탓이겠지.
여행기를 준비하면서 자료들을 찾아보니, 통도사는 계절별로 축제도 많고, 볼거리도 많고, 하는 일도 많은 곳이었다. 계절마다 매화, 벚꽃, 연꽃, 메밀꽃 등등 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가득하고 넒은 들판에는 야생화 군락지로 가득했다. 금강송 군락지 길도 너무나 멋스러웠다.
통도사에는 보물이나 문화재도 많지만, 축제도 많고, 약된장을 개발하기도 했으며 천연염색 기법을 재연하여 계승하고 있기도 한다고 한다. 통도사는 아마도 대부분의 절이 그러하듯, 일반 중생들의 깨우침이나 가르침 마음의 안정을 돕는 것 외에도 그들 속에서 같이 생활하며 살아가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는 절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곳곳에 붙여진 동물 안내판으로 보아 생명체면 무엇이든 '같이 살아간다'의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는 지도. 풀어 놓고 키우는 동물 친구들이 있다고 했는데 아쉽게도 나는 전혀 보지 못했다. 공작새를 보고 싶었는데. 안내문구만 봤을 뿐이다.
이런저런 자료들을 읽어보고 영상을 보면서, 내가 본 것 느낀 것은 '새발의 피'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고작 몇 시간 동안 잠시 눈호강만 할랑말랑하고 돌아간다 정도?
역시 무작정 떠나는 여행의 맛도 있지만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의 차이는 이렇게나 컸다.
다른 계절에 공부해서 다시 방문한다면 지금과는 다른 것들을 볼 수 있을 거고 새로운 것을 느낄 수 있겠지.
또한, 통도사는 넓은 주차장이 곳곳에 매우 잘 갖춰져 있어서 방문하기가 수월한 고마운 절이었다. 심지어 암자에도 주차장이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보통, 절은 많이 걸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가야 되거나 산을 탈 각오 정도는 해야 갈 수 있는 곳이 많다. 그렇기에 오래 걷기 불편하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은 차를 이용해 근처까지 들어갈 수 있는 절과 암자들이야 말로 정말 고마울 수밖에 없다. 나만해도 차가 아니었다면 통도사를 보고 난 후, 과연 이런 암자들까지 구경을 할 엄두를 낼 수 있었을까?
난 불교 신자는 아니다. 하지만 절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한다. 오랜 역사를 가진 사찰들은 방문하면 그 각각의 느낌이 다르다. 처음부터 하나인 듯 자연과 어우러지는 전각들의 모습도 좋고, 전각 안팎의 비슷한 듯 다른 불화와 탱화도 보는 것도 좋고, 긴 산책길이 있어서 걸으며 이런 저런 생각들을 정리할 수도 있어서 좋고,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다.
심지어 각 사찰마다 풍기는 특유의 향기도 좋다. 곳곳에 심어진 나무와 꽃들의 향기와 전각안에서 피우는 향의 냄새가 어우러져 내는 독특한 향기.
또한 전각과 보물, 장소에 얽힌 이야기라도 알게 된다면 보너스를 받은 듯 대단히 즐겁기까지 하다.
이번 통도사 여행은 역시나 나에게 비움과 그를 통한 여유를 찾아 주었다. 경내를 돌면서 고민이나 걱정거리들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다행히 그 시간동안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애쓰지 않아도 절로 그렇게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온전히 나의 시간을 보내고 나니 내면의 용기나 기운이 조금은 채워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여전히 통도사에는 보지 못한 전각들과 암자들이 보물처럼 많이 남아 있다. 살면서 한 번씩 생각날 때마다 위로를 받고 싶거나 용기를 얻고 싶을 때 한 번씩 찾아오게 될 것 같다.
이제는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전라도 지역에 있는 '송광사'만 남았다. 사찰에 도장 깨기를 하러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사찰은 그 나름대로의 특색과 분위기가 있으므로 여러 곳을 찾아가 보고 싶다.
*혹시 <통도사>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인터넷을 이용해 찾아보세요. 관련 자료는 매우 많습니다.
제 글은 정보 전달이 아닌 그냥 저의 느낌을 위주로 매우 주관적으로 슥슥 쓰였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