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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카리 Aug 03. 2021

이제야 밝히는, 내가 제주에 온 이유

재미로.

음... 재밌을 거 같잖아요!


제주로 이사 간다니, 재밌을 것 같지 않나? 다들 속으로 '오~' 한 번쯤은 외쳤을 것 같다. 나만 그런가? 아님 말고.


나 제주도 왔다!


슬슬 제주도에 온 이유를 풀어낼 때가 됐다. 어떤 특별한 계기로 제주도행을 단번에 결심한 건 아니다. 그것보다는 제주로 가보자는 생각에 서서히 물들어 버린 것에 가깝다.

그보다 더 일찍, 훨씬 일찍, 나는 이사를 가겠다고 마음 먹었다. 내가 살던 곳은 반전세 오피스텔이었는데, 지어진 지 20년 된 복층이었다. 집이 꽤 넓고 교통이 좋아서 평소엔 크게 문제가 없었다. 회사와도 가깝고 옆집도 시끄러운 편이 아니었고 바로 앞에 운동하기 좋은 강변이 있었다. 문제는 한여름과 한겨울이었다.

복층에 살아봤다면 알 것이다. 천장이 높아서 답답한 느낌이 별로 없고, 수납할 곳도 많은 편이다. 다만 냉난방이 힘들다. 게다가 나는 가장 끝집이어서 창문이 두 면으로 났고, 밖을 향한 두 면은 벽이 아니라 온통 유리창이었다. 겨울엔 뽁뽁이를 2겹으로 붙여놓고 방한커튼까지 달았지만, 20년 넘은 벽으로까지 들어오는 한기는 말단 저체온증인 발까지 닿았다.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한쪽 구석 벽지가 젖어 까만 곰팡이가 생겼다. 나는 결심했다.

이놈의 집구석, 내가 나가고 말지


내가 살던 오피스텔은 1년 계약이 기본이었는데, 1년 뒤에 이사를 하려니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는 바람에 주변에서 더 싼 집을 찾을 수 없어 포기했다. 2년 차엔 집주인도 계약을 연장하기 싫다는 뜻을 내비쳤다. 임대차법이 바뀌어서 내가 원한다면 더 있을 수 있지만, 그럴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번엔 떠나야 한다, 꼭!!!


나는 강원도 출신이라, 자연이 항상 가까웠다. 지평선을 바라보면 산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시야가 트여있고 계절의 색을 머금은 자연을 곁에 두는 게 좋았다. 그래서 수도권에 살아도 약간 도시 외곽이나 청계산입구역 인근처럼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에 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막 취업한 신입사원에게 미래의 창창한 가능성을 꿰뚫어 보고 몇억을 빌려줄 은행은 없었다. 첫 집은 저렴하고 교통이 좋은 곳일 수밖에. 도시를 벗어난 생활은 먼 훗날의 이상이었다.

짬이 좀 찬 3년 차 사원은 돈을 빌릴 곳이 좀 생지만, 그사이 전세는 씨가 말랐다. 여기보다 좋은 곳에 가려니 교통이 불편하거나 집이 좁아진다. 검은 얼룩이 있는 벽지를 보고 한숨을 짓다가, 문득 내게 어마어마하면서 가슴 벅찬 생각이 떠올랐다. 회사에는 제주지사로 발령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고, 팀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멀어진다 해도 코로나 시국에 재택근무 모니터 앞 30cm는 지킬 수 있었다.

에이 설마! 음, 근데 혹시...?

재미로 네이버 부동산에 들어가서 제주도 전세를 알아봤다. 그 당시가 1월 즈음이었는데, 제주도에 한창 매물이 많은 시기였다. "오? 여기, 살만하겠는데? 이 정돈데 여기보다 싸고 좋아?" 그게 제일 처음이었다. 더럽게 가격만 비싼 성남 매물을 보다가 완전히 다른 신세계의 매물을 접해버렸다. 살짝, 내 머릿속 어딘가에 하나의 옵션이 자그맣게 생겼다.

제주에서 살아볼까? 나만 그런 생각하는 건 아니다.

제주도에 집을 보러 왔을 땐, '살짝' 흥미가 이미 흥미의 수준을 뛰어넘어 나를 지배하는 생각이 됐을 때였다.


지금 아니면 힘들걸?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지금 아니면 못 가'라는 유일성이 나를 가장 강하게 제주로 이끌었다. 나중에 직장/직업이 바뀌거나 함께 지낼 존재가 생긴다면 몸이 무거워져 옮기기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마치 '사도 그만, 안 사도 그만'이었던 상품을, 파격적인 90% 할인이벤트에 그만 질러버린 충동과 같다. 직장과 업무 변경 없이 제주살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드디어 끼워진 마지막 한 조각

조각 10개를 모으면 완성되는 퍼즐이 있다고 해보자. 지금 9개를 가지고 있는데, 1개를 비워둔 채로 놔두고 싶은가? 9개를 모아왔던 것보다 조금의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해도, 1개를 채워 완성하고 싶지 않나? 그 한 개가 내게 제주도였다. 나는 경상도에서 태어나, 강원도에서 아동-청소년기를 보냈고, 전라도에서 성인의 첫걸음을 디뎠으며, 충청도로 입대했고, 수도권 회사에 취직했다. 남은 것은 제주도뿐이다. 그거 다 살아본다고 누가 퀘스트 보상을 주거나 칭찬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냥 다 채우면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나? 음... 별 의미 없어 보이지만, 어차피 살아간다는 것이 의미 없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인걸.


재밌을 거 같아!

정말 마음에 드는 곳에 여행을 간다면, 누구든 한 번씩은 생각해봤을 것이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하루하루가 여행 같은 삶, 주변에 꼭 한 명은 그런 삶을 동경하지 않은가? 그걸 내가 한번 해봤다. 여행이 아니라 일상이라면 조금 다를 것이란 사실은 모두가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도 쫌 안다, 나도 취미로 취업하게 된 '덕업일치'라 본격적으로 뛰어들 때의 다른 느낌. 좋은 여행지와 재밌는 취미를 잃게 될 수도 있지만, 그 다른 어떤 것보다 행복한 일상과 즐거운 직업을 가지게 된다.


자랑해야지~

가족이나 친구들한테 제주도에 산다는 것은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나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여행지라 자부할 수 있는 곳에 사는걸. 자랑거리 하나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실컷 얘기할 수 있는 주제가 하나 생긴 것이다. 지금도 지인들은 '제주도에 사니까 어때?'하곤 묻는다. 육지보다 너무너무 좋다고, 시원한 바다를 느끼며 아침을 맞이하고, 아름다운 일몰을 보며 운동하고, 한라산의 정기를 받아 일한다고 말한다. 정말 행복하다고 말하면서 "그러니까 놀러 와~"한다. 내가 친구가 없어서 심심하다는 걸 숨겨야 의심 없이 놀러 올 테니까.

고작 대화 주제 하나 생긴 게 얼마나 대단할까 싶지만, 난 내 자랑거리에 많은 도움을 받아왔다. 나는 책도 써봤고, 에베레스트도 가봤고, 혼자 떠난 유라시아 여행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몽골 봉사활동도 해봤고, 내 생일 때 지인과 함께 기부프로젝트도 해봤다. 이런 사람이랑 대화하고 싶지 않나? 질문 하나 정도는 생기지 않나? 나는 그게 참 좋더라, 자연스럽게 대화할 기회를 잡을 수 있어서. 하나 단점이 있다면, 약간 독특한 경험 때문에 친한 친구들은 미쳤다고 하기도 한다.


제주, 날다


그렇게 나는 힘차고 벅차게 제주로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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