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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원 Jun 27. 2023

함께 하고 싶은 일들


모자를 판매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이 쓴 모자로 판단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자신에게 익숙한 것만 보게 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뜻으로 그 이야기를 이해했다. 나 역시도 친구가 자신의 갈등 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기로 했는지를 친구가 말하는 때에, 마음속으로 이 친구는 정말 건강하구나 하고 나도 모르게 생각하게 된다.


만약 누가 사랑의 기억을 먼저 말하고, 자신에겐 힘든 것이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한다면, 나는 반사적으로 저분은 심리적 고통을 부인하는 편인가 걱정하며 들을 것 같다. 세상에 좋은 일만 일어나는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사랑의 기억보다 미움의 기억이 더 강렬하게 기억되는 것이 보통인가 싶다. 난 괜찮다며 오랜 시간 견뎌오신 어르신들이 신체증상 장애, 화병으로 고생하고 계신 것을 볼 때마다 마음속의 확신이 강해진다. 세상에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구나. 아프면 상처를 받는 것이 사람이구나 하는 확신. 나는 아무래도 우울증을 가진 환자분들이 진료의 대부분을 차지하다 보니 내가 듣는 사람의 마음이 상당 부분 치우치기도 한 것 같다. 어떤 때엔 나의 행복이나 기쁨이 상대에게 불편한 마음을 줄까 봐 조심스럽기도 하다. 


내가 사진을 찍는 이유에 대해,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이 내 마음을 표현하고 담아두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어째서 어떤 장면에 나는 마음이 끌리는 것일까. 마음이 끌리는 어떤 장면을 많이 담다 보면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알게 되면, 내가 마음이 가는 이유에 대해서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내가 결혼 전에는 내가 아이의 성장과정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사진을 향한 진지한 다짐의 불순물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는 식상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오히려 요즘은 그런 풍경의 사진보다도 아이 관련된 기록들이 좀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시간이 지나 예전의 사진을 보는 때에 그것이 어찌나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되던지. 참깨를 압착해서 참기름을 만들듯이, 어떤 시간을 정제하고 압축해서 기름으로 만든 것 같다. 


한동안은 동영상을 찍어 유튜브 계정에 올리기도 했다. 병무청 근무 시절이었다.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주호와, 당시 아직 혼자서 설 수 없는 승하가 영상으로 남아있다. 이렇게 말도 잘 하고 잘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당시엔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다. 최근 아내가 출산한 나의 동기가, 육아는 얼마나 힘드냐고 물어서, 첫 100일은 인턴 시절만큼 힘들다고 대답했다. 당시엔 그 시절을 견디는 것이라고 생각했지 나중에 그리워할 것으로 생각하진 못했다. 출퇴근길 이동시간이라든지. 아니면 진료 중 잠깐 시간이 생긴 점심시간 같은 때에, 사연 있는 사람처럼 과거의 사진과 영상을 본다. 그런 것들을 지하철에서 보고 있자면 옆에 계신 어르신들이 좋은 때라며 말을 건네신다. 그동안은 동네의 타인과 이야기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아이와 관련된 소재는 아이스브레이킹에 좋다. 


아이들이 어려서는 마음에 여유가 잘 없었다. 외식은커녕 집에서 밥을 챙겨 먹기도 쉽지 않았다. 다른 취미활동을 하기도 쉽지 않으니 육아가 끝나고 나면 지친 몸과 마음으로 아내와 서로 말도 없이 야식과 맥주를 먹었다. 요즘은 아이들이 자라면서 내가 필요한 시간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한편으로 내 삶에 여유가 생긴 것 같아 다행이다. 요즘은 친구와 약속을 잡듯이, 오늘 아빠랑 나가서 밥 먹을래? 물론 메뉴는 아이들이 페퍼로니 피자나 짜장면을 고를 테지만. 덕분에 개인 시간이 생겨서 운동도 하고 하고 싶었던 일들도 한다. 


취직 전에 다시는 없을 기회라고 생각해서 제주 한 달 살이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잡고 서는 것만 겨우 가능한 승하를 데리고 그런 용감한 결정을 했는지. 그 시간이 아니라면 다시는 그런 시간을 보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겨울이라 바다는 어렵고 해서 온갖 제주 서쪽을 돌아다녔다. 아이를 위한 (평소라면 관심 없었을) 박물관 테마파크 교육관이라든지, 곶자왈을 걷고 오름을 많이 올랐다. 배에 아기 띠를, 한 손에 휴대용 유모차를, 그리고 그걸 남겨야겠다고 한 손엔 무거운 카메라를 들었다. 곶자왈에는 미끄럼 방지를 위한 턱이 많아 유모차를 끌 수가 없었다. 허리는 끊어질 것 같은데 아이는 아기 띠로 배에 들춰매고, 나를 원망하는 아내의 눈빛이 당시 영상에 남아있다. 당시에 아내의 눈빛을 보고 마음이 서늘했는데, 오랜만에 영상으로 다시 보았을 때는 웃음이 났다.


육아의 긍정적인 측면만을 말하는 것을 경계한다. 실로 수많은 어려움이 있다.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도 다 시간이 지났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당시엔 아이가 예뻐서 좋겠다는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나의 아내는 경력이 단절되어 불안해하는 동안, 육아가 신성하다는 말을 듣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숭고한 육아가 나는 왜 힘들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은 다 그 시절이 좋았다는데 나는 혹시 부모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것인가 스스로를 의심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야기하기가 더 어려운데, 그럼에도 아이들과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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