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원 Jul 07. 2023

애프터 썬 연상


영화 애프터 썬이 좋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서 언제 어떻게 보나 고민했는데 어쩌다 최근에 보게 되었다. 과거엔 영화가 친절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더 복잡하고 불친절할수록 좋아했다. 그때엔 오랜 기간 동안 영화를 한 주에 여러 편을 보았는데 요즘엔 영화관에 갈 시간을 내기 쉽지 않다. 티비도 거실이 아닌 아이와 다 함께 자는 안방에 있어서 아이들이 처가나 본가에 가지 않는 이상 집에서는 보기도 어렵다. 요즘은 일 년에 몇 편 보는 정도라 취향이 좀 변한 것 같다. 어려서는 시원하게 부수는 액션 영화가 좋다는 아버지가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나도 이제는 미묘한 감정을 따라가는 영화를 보는 것은 피곤하다. 그저 편하게 내가 소화하지 않아도 되는 영화를 보고 싶었나 보다. 애프터 썬은 생각보다 결말이 불친절했고 당혹스러웠다.


별 정보 없이 영화를 보았는데 문득 떠오른 어려서의 기억이 떠올라 현실의 삶에 영향을 주는 그런 내용이길 막연히 기대했다. 비유하자면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처럼. 나도 나 자신이나 나를 둘러싼 환경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어떤 기억이 떠올라서 내 삶에 대한 이해를 바꾸게도 되는, 마치 마음속의 모닥불처럼 따뜻한 기억 같은 영화이길 바랐는데 그런 영화는 아니었다. 하긴 기억이란 게, 아니면 사람에 대한 이해라는 게 원래 이렇지 않나. 누군가 굉장히 밉다가도 괜찮은 일들도 떠오른다. 아하 반응이라고 해서, 내 삶에 대해 어떤 통찰을 얻게 되는 순간은 굉장히 짜릿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인생이 드라마틱 하게 변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이 매우 느리고, 때로 따분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오히려 영화에서 어떤 판타지 혹은 마법 같은 순간을 기대하는 것 아닐까. 영화를 보고 나서 처음엔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며칠이 지나도 자꾸만 마음이 쓰여서 생각하지 않고자 해도 영화에 대해, 나의 가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이 영화를 보고 느끼게 되는 어떤 체험의 일부라고 한다면 효과적인 셈이다. 다만 내가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아이와 놀고 있자니 중년의 어떤 남성분이 본인의 과거를 떠올리시면서, 자신은 자녀가 어렸을 때 아이와 놀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놀아야 하는지도 몰랐고, 남들도 다 그렇게 지내서 아빠는 그저 직장에서 돈을 벌어오면 충분한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하셨다. 지금 자녀와의 관계가 서먹하신데 그런 게 원인이지 않았을까 싶다고 조금은 안타깝다고 했다. 시대에 따른 부모의 역할이 변하는 것 같다. 요즘은 부모에게 바라는 것이 많은 세상이다. 그 역할을 다 할 수 없다면 낳지 못하겠다고 다짐하는 마음이 이해도 된다. 나는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양적으로는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질적으로도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아이들과 붙어있다 보니 아이들에게 화를 내는 경우도 종종 아니 꽤 자주 있다. 주호는 내가 모닥불에 장작을 태우듯이 화를 낸다고 한다. 아마도 좋은 기억보다 불같이 화를 내는 아빠가 먼저 기억나지 않을까 싶다. 진료하면서도, 환자들이 나와 잘 맞지 않으셨는지 어떤 이유에서 떠나는 경우가 있다. 그런 때에 알게 모르게 상처를 받는다. 사람마다 맞는 치료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나의 부족함은 무엇이었을지 자신을 탓하게 된다. 일의 영역에서도 이러한데, 나중에 가족에 대해서는 좀 더 마음의 파장이 클 것만 같다. 아이가 나중에 나를 원망한대도 무너지지 않고 견디는 것까지가 내 역할이다 생각한다만 마음은 꽤나 쓰릴 것도 같다.


나는 어떤 에피소드나 장면보다 기억에 남는 풍경, 장소가 있다. 그런 풍경을 떠올릴 때 그 시기의 감정이 강렬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과거에 올레길 트래킹을 좋아했다. 하루 종일 길을 걷는 일. 걷다 보면 별로 할 말도 없다. 힘들어하고 다리 아프다 푸념하면서 풍경도 바라보고 조용히 걷는 일들이 좋았다. 한 번은 내가 학생일 때 게스트하우스에서 어떤 아저씨들과 만나 3-4일간 걷기도 했다. 두 분은 서로 자동차 동호회에서 오래 만난 친구 사이로 인생의 고비라고 해야 하나, 한 분은 이혼을, 한 분은 퇴사를 앞두고 같이 여행을 왔다고 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싹싹한 젊은이 역할을 하며 같이 걸었다. 적당히 맞장구도 치고, 적당히 침묵도 하고. 같이 걸으면 재미있기도 하고, 또 당시 내 돈으로 사 먹기 어려웠던 음식을 얻어먹어서 좋았다. 학생 시절엔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으니 짬뽕이나 고기 국수 같은 음식을 사 먹었는데, 그 아저씨들이 사주는 갈치조림이나 문어숙회가 맛있기도,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때 그 아저씨들은 괜찮으니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열심히 먹으라고 했었는데.


언젠가 그런 트래킹 코스를 가족과 함께 걸을 수 있다면 좋겠다. 올레길도 좋고, 안나푸르나, 산티아고 순례길, 집 근처 산도 좋겠다. 아이들은 언제 클지 그리고 고생만 가득한 트래킹을 아내가 좋아할지 잘은 모르겠다. 삶이 여행처럼 느껴지는 시간들이 있다. 여행에서도 늘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는 것 같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올레길 코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고 그 때 먹은 갈치조림이 맛있었던 것이 생각이 난다.

이전 15화 자갈치가 매운 생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