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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원 Jul 05. 2023

타지 않는 장작

 타지 않는 장작이란 표현을 예전에 병원에서 근무할 때 멀리서 들은 적이 있다. 잰 타지 않는 장작이야. 선배가 갈구는데 (갈군다는 말 외에 적합한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충분히 괴롭힘당하지 않는 후배를 가리키는데 쓰이는 말이었다. 태우려 해도 타지 않는다고 선배가 답답하다며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때리는데 왜 타격감이 없냐는 뜻이었을지. 한편으로는 동기들 사이에서는 멘탈이 강하는 의미에서 사용되기도 했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자기 정신줄을 붙잡고 있으니 대단하다는 식이었다. 요즈음 종종 타지 않은 장작을 떠올린다. 혹시 나도 큰불 옆에 있어서 함께 타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큰불에 삼켜지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다른 과에서 콧물이 나오면 콧물약을 받고, 기침을 하면 기침약을 받는다. 환자분들은 병원에 어떤 기대를 갖고 조금이라도 나아지기 위해 병원에 방문한다. 그렇지만 정신과의 대부분의 질환은 만성질환, 그것도 잘 낫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난감한 경우가 많다. 오셔서 어떤 불편감에 대해 이야기를 하시면 그에 맞게 처방을 변경하거나 새로운 약을 추가해 보면 좋겠지만, 이미 복용하고 있는 약이 충분히 많을 때가 있다. 약을 무작정 높인다고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 아니다. 어떤 때엔, 증상의 악화라기보다 환자의 불안감이랄까, 아니면 치료자에 대한 불만 같은 것들이 증상의 악화라고 표현되는 경우도 상당히 많은 것 같다. 환자의 불안이 내게 투사가 되어 내가 불안한 마음이 된다. 나도 내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처방에 손을 대고 싶은데 대부분 그런 경우는 약물 변경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약을 올리지 않고 좀 더 지켜보자는 말을 하기 쉽지 않다. 그것이 꼭 나의 무력감을 인정하는 일 같다. 무엇이든 손쉽게 해결하는 어떤 유능한 의사의 환상이 나를 괴롭히는 것일까. 문제를 약으로 당장 해결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타지 않는 장작이 되려면,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많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언제 밥이나 함께 먹자는 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밥은 혼자 먹어도 되는데 꼭 누군가와 함께 먹어야 하나. 밥 먹으면서 별다른 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함께 먹는 어떤 음식이나 꼭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도, 행동을 공유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닐지. 어쩌면 병원에 찾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일정 기간 동안 있던 내 마음을 말하고 다시 돌아가는 일. 꼭 무엇을 받거나 변경되지 않아도 어려운 시간을 함께 견딘다는 것이 의미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타인의 불안을 소화해서 돌려준다는 표현이 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느끼는 불안이, 타인을 통해 받아들일만한 불안으로 바뀌게 되는 과정.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지금 그렇게까지 불안해할 것은 아니구나 안심을 하게 된다고 한다. 치료자도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함께 활활 타오르게 된다면 진정되지 않을 것이기에 내 역할은 함께 타지 않고 견디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떤 분들은 그런 태도를 두고, 자신의 어려움에 발 벗고 나서주지 않는다고 답답해하시는 것 같기도 하다. 타인의 불안에 같이 타오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거리를 두지도 않고 그것을 함께 견딘다는 것이 쉽지 않다. 사람의 마음은 복잡하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주호는 비교적 순한 편이다. 행동이 산만하지 않고, 감정 표현이 조심스러운 편이다. 지금이야 주호에 대해 그렇게 받아들이지만, 주호가 24개월가량 되는 시기까지는 주호를 돌보는 일로 나와 아내가 많이 지쳤었다. 그때엔 주호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방법을 모르던 시기였다. 아이는 날것 그대로의 불평과 짜증과 화를 쏟아냈는데, 그것을 견디기 어려웠다. 당시 주호의 화는 마치 엄청나게 뜨거운 용광로가 주변의 모든 것을 삼키는 것 같았다. 그래도 정신과 수련을 받으며 지식적으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소용이 없고 내 한계를, 무력함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 힘들었다. 나 자신과 아이의 문제 앞에서 무력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무력함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나서야 마음이 비교적 가벼워졌다.  육아가 힘들다는 환자분들 이야기를 더 잘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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