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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삶이 깊어지는 계절이다

by 배은경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다.

낮엔 여전히 반팔이지만, 아침과 저녁으로는 긴 소매가 어울린다. 가을을 가장 먼저 느끼게 해주는 건 온도가 아니라 풀의 기운이다. 한때 무성했던 풀들이 어느새 한풀 꺾이며 계절의 변화를 알려준다.


잔디를 깎고, 화단을 정리하고, 여름 내내 기쁨을 주던 토마토를 정리했다. 깔끔해진 마당과 텃밭을 바라보니 마음도 함께 정돈되는 느낌이다. 텃밭을 재정비하고 배추, 무, 당근, 파 씨앗을 파종했다.


무화과는 여전히 풍성하다. 크고 잘 익은 건 새들의 몫이지만, 새들이 먹지 않은 작은 열매도 제법 많다. 그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작은 무화과를 마멀레이드로 만들었다.


감나무 아래서도 계절의 순환을 느낀다.

곧 따야지 하던 감이 어느새 새들의 입에 먼저 닿는다.

홍시를 기다리는데 해마다 새들이 남김없이 먹었다.

감나무 가까이에서 새들이 먹는 것을 바라보다가 감의 모양이 마트에서 구매한 단감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갛게 익지 않은 감 하나를 따서 깎아 먹어보니, 놀랍게도 달았다. 단감나무라는 것을 몰랐다.

빨갛게 익지 않아도 단맛을 품은 단감이었다.


그 순간, 마음이 잠시 멈췄다.

빨갛게 물들지 않아도 이미 제 맛을 내는 단감이라니.

새들이 열심히 먹는 단감을 따서 먹어보지 않았다면 올해도 감을 먹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감나무 5그루에서 바람에 떨어지고 새가 다 먹고 온전하게 남은 감이 8개였다. 감나무에는 새들이 먹다 남긴 홍시들이 여기저기 매달려 있다. 새들이 홍시를 열심히 먹는 이유를 알겠다. 사서 먹는 단감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달콤함과 신선함이 가득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누군가는 아직 덜 익었다고,

조금 더 준비되어야 한다고,

조금 더 나아져야 한다고 스스로를 미루며 살아간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달콤한 단감일지도 모른다.


제주에 이사하고 나는 가을이 되면 ‘비워야 한다’는 말을 떠올린다. 나무들이 잎을 떨구기 시작했다. 나무가 잎을 떨구는 이유는 겨울을 준비하고, 자신을 가볍게 하려는 본능 같은 것이다.


삶도 그렇다.

우리는 채우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비워내는 일에는 서툴다. 더 많은 관계, 더 많은 일, 더 많은 물건이 내 삶을 풍요롭게 해 줄 거라 믿는다.


하지만 가을은 묻는다.

“정말 그것들이 너를 행복하게 하고 있니?”


가을은 인생의 오후 같다.

이제는 빠르게 달리는 대신, 내 안의 온도를 살피게 된다. 삶도 조용히 성장해 간다.

그 과정에서 평온과 고요가 함께 찾아온다.


가을은 아름답다.

삶의 본질을 다시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가을이 내게 건넨 사유의 결이 마음 깊은 곳에 잔잔히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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