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플스테이의 유행은 갔다. 대세는 …..
슬픔에 관하여.
무엇에 관해 적을까를 생각한다. 적는다는 것은 가깝고도 너무 먼 일이라 적당한 때와 정해진 장소를 찾는다. 무르팍에 고양이가 올라앉으면 앉아서 좋고, 없으면 허하다. 허하다는 것은 슬픔의 다른 이름일까에 생각이 가닿는다. 아마 그것은 아닐 것이다. 익숙한 것을 적기 위해서 다소간의 낯섦이 필요하고, 적어지는 객체와의 거리감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우리의 관계는 너무나도 가깝다.
인생은 불만족의 연속이다.라는 한 문장을 나눠 받은 후, 인생은 사실 슬픔의 연속은 아닐까 숟가락을 얹는다. 아니, 분명하다. 당신을 만난 순간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모자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 낯선 행복이 일상의 영역으로 격하되면 다시 불만족이 고개를 치켜든다. 치켜드는 놈의 고개를 꺾어버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으리라. 그러나 세상은 녹록하지 않고 저마다 완벽에 해당하는 이데아가 있어서 슬프다.
완벽한 것들이 없다는 생각과 오염을 씻어내는 정화의 주체에 대해 생각이 미친다. 무엇이던(그 어떤 오염이던) 흐르는 물에 씻으라고 하지 않는가. 빨래에 대해 생각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어떻게 물은 모든 것을 씻어낼 수 있는가. 심지어는 세제조차 ’ 헹궈낸다.‘ 그 모든 더러움을 담고, 다시 순환할 수 있는가. 우리가 사는 차원에서 물은 형이하의 모든 것을 씻어낸다. 형이상의 것들을 씻는 매개체는 시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에 씻겨지는 존재다. 제아무리 잘난 사람도 시간 앞에서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또 옛말은 맞다. ’시간이 약이다.‘ 너무도 큰 감정은 시간으로 씻기지 않을 것이라 블러핑을 한다. ’영원한 사랑‘ 같은 것들이 좋은 예다. 안다.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너무도 빈번히 영원을 입에 담는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너무도 엄청난 속도의 ’정보‘들이 들이닥친다. 이 맹렬한 정보의 해일이 결코 잊어선 안 될 중요한 것들을 잡고 있는 정신적인 손을 비웃는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에 휩쓸려 산다.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제대로 된 것인지를 번민하며 산다.
산다는 것은 무엇이라고 했던가? 두 문단 위를 보라. 불만족의 연속이다. 중요한 것들은 결코 놓을 수 없고, 놓여날 수 없는 것들이다. 눈을 감으면 그 안에 필요한 것들이 다 있다. 요즘에는 감지 않아 뻑뻑해진 눈에 인공눈물을 뿌린다. 가질 필요 없는 것들을 가지려고 버둥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여기에는 물이 없는데’라는 생각을 한다. 이 또한 다른 의미의 슬픔인 것이다.
만일, 눈물을 흘려야만 슬픈 것이라면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 눈물 흘리지 않아도 슬픔이라면 슬픈 일로 일과가 가득 찰 것이다. 좋은 것들을 더 좋게, 나쁜 것들은 그닥 나쁘지 않게. 글을 적다가 중간에 적는 이유를 잃어버렸다. 이렇게 목적성이 없는 글도 나쁘지 않다. 터억 힘을 빼고 사뿐사뿐.
결론은 이렇다. 시선의 차이라는 것. 너무 선문답이기도 하고 너무 빤한 답이기도 하다. 물그릇의 물이 반 있을 때 그게 비워진 것인지 결정하는 것. 좀 삐딱하게 보자면, 인생을 그 자체로 만족하며 살 수는 없나? 왜 우리는 물그릇만 얘기하곤 하지? 템플스테이를 하듯이 최악의 순간들을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남에게, 혹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피해가 가지 않도록 사고실험을 해봐도 좋다. 인생의 좋은 것들이 반쯤 빈 것이 아니라, 바닥에서 쌓아 올린 것이 반쯤 찬 것이라면? 그 성취를 자랑스레 바라볼 것 같은데 왜 채우지 못한 나머지 반의 공허만을 보는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