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판정전담의사가 경험한 측정의 딜레마, 의사에서 개발자를 꿈꾸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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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외과 전공의를 수료하고 드디어 국방의 의무로 병역판정전담의사로서의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4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마치고 나서, 선배 병역판정전담의사 선생님으로부터 판정 업무에 관한 인계를 받았습니다. 국가법령정보센터에 공개된 '병역판정 신체검사 등 검사규칙'이라는 책자도 받아 열심히 숙지하였습니다.
이 책자의 정형외과 질병 중 174번 골절 항목부터 229번 말초신경장애 항목까지, 모든 판정은 제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제 이름을 건다는 것은 곧 모든 판정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진다는 의미였습니다.
법적인 책임이라는 말이 섬뜩하게 다가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병역은 매우 민감한 문제입니다. 어린 시절 제가 기억하기로는, 대선 유력 후보자의 운명마저 좌우할 수 있을 만큼 예민한 사안이었습니다. 혹시라도 잘못된 판정을 내린다면 제 인생에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될 것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이 밀려왔습니다. 앞으로 하나하나의 판정을 신중히 내려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을 좌우할 수 있는 결정의 책임감이 주어진 급여에 비해 너무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판정의 정확성이라는 믿음으로 업무에 임했습니다.
정형외과 병역판정에는 많은 항목에서 각도, 면적, 길이 측정 등의 작업이 필요합니다. X-ray나 CT 등의 검사를 시행한 후에는 컴퓨터 모니터에서 마우스를 활용하여 측정 작업을 진행합니다. 이러한 측정은 이중 크로스 체크로 이루어집니다. 영상의학과 전문의가 1차 측정을 하고, 정형외과 전문의가 2차 측정을 한 후 최종 판정을 내리게 됩니다.
저는 이런 판정을 할 때마다 내적 갈등을 겪었습니다. 대다수의 수검자들은 본인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나 질병이 있다면, 현역복무 판정을 받지 않기를 희망할 것이라 짐작합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경험한 바로는, 판정을 받은 수검자들 중 거의 절대다수가 4급 보충역이나 5급 전시근로역 판정을 받으면 기쁨이나 안도의 표정을 지었습니다. 물론 수검자들의 진정한 속마음까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내적 갈등이 시작됩니다. 헌법 제5조에는 '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며'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국방의 의무는 신성하지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된 의무인 것입니다.
정형외과의 병역판정은 앞서 서술한 대로 각도, 길이, 면적 측정 등으로 이루어지는 부분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근무할 당시에는 척추측만증의 경우 Cobb의 각도가 20도 이상이면 4급 보충역, 40도 이상이면 5급 전시근로역으로 판정했습니다. 또한 평발의 경우에는 거골-제1중족골 각도가 16도 이상, 또는 종골경사각이 10도 미만이면 4급 보충역으로 판정했습니다. (사진 1) 물론 현재는 기준이 달라졌습니다.
이런 측정 작업은 의학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일치도의 문제가 존재합니다. 즉, 관찰자 간 일치도(inter-observer reliability)와 관찰자 내 일치도(intra-observer reliability)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발 사이즈가 240mm라고 가정해 봅시다. 발 사이즈를 줄자로 잴 때, 두 명의 측정자가 측정하면 서로 다른 수치가 나올 수 있고, 한 명의 측정자가 두 번 반복 측정할 때도 결과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조금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발 사이즈가 240mm 미만이면 현역 복무가 부적합한 상황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측정자 A가 측정했을 때는 239.5mm, 측정자 B가 측정했을 때는 240.1mm, 그리고 측정자 A가 다시 한번 재측정했을 때는 240.5mm가 나왔다고 가정해 봅시다. 충분히 이런 경우가 가능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신가요?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판정해야 할까요? 병역판정전담의사는 이런 경계선상의 사례를 늘 판단해야 합니다.
병무청의 정형외과 판정에는 명확하게 진단만 되면 판정할 수 있는 질환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관절 무혈성 괴사 같은 질환은 병무용 진단서에서 확인되고, 병무청에서 X-ray를 찍어서 뼈의 변형만 확인이 되면 즉시 판정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명확한 질환들은 고민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병역판정전담의사가 직접 측정을 해서 판정해야 하는 경우, 측정 결과가 급수와 급수 사이의 경계에 걸쳐 있는 애매한 상황이 늘 고민거리였습니다. 대체로 많은 수검자들은 4급 보충역이나 5급 전시근로역 판정을 받으면 기뻐하기 때문에, 저도 사람인지라 제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기쁘면 저 역시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수검자가 행복하면 저도 행복했습니다.
오히려 수검자가 원하는 판정을 받지 못하면, 이 수검자에게 상황을 이해시키기 위한 긴 대화가 시작됩니다. 이 업무도 경험이 쌓이다 보니, 이런 수검자들과의 이견도 어느 정도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넓은 시각에서 보면, 저는 이제 군 복무 기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고 인구도 감소하고 있는 국가병역자원관리의 현황도 신경 써야 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측정할 때 애매한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측정을 자동화할 수 없을까 하는 고민을 늘 하면서 판정의사로 복무하였습니다. 자동측정이 어렵더라도 측정함에 있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이런 측정의 문제는 적어도 사람이 하는 것보다 감정이 배제된 컴퓨터가 자동으로 해주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은 경우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고민이 추후에 제가 대학원에 진학하고 연구주제를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사실 군 복무 또는 군 대체복무를 하면서 그 집단의 시스템을 개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비록 이 연구를 한다고 하여 누가 돈을 주는 것은 아니겠지만, 저는 이 문제를 추후에 꼭 해결해야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저는 저의 단기 미래를 이 연구에 투자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정형외과 전문의와 의학박사인 저는 추후에 컴퓨터 관련 학과에 진학해야겠다고 점점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융합의학 또는 중개의학에서 이야기하는 'Unmet needs(미충족 수요)'를 병역판정전담의사를 하면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Where there's a will, there's a way”
“측정의 딜레마라도, 해결 의지가 있다면 길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