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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소운 May 10. 2021

마법의 양탄자

보고싶다

양탄자라고 불러도 될까.


영어로는 러그 (Rug)..? 발밑에 까는 작은 카페드 조각이라 해두자. 별 의미없이 들고날때마다 신발 밑창의 흔적을 깨끗이 지워주는 것, 때로는 마루가 쿵쿵 울리지 않게 발뒤꿈치 소리를 잡아주는 것, 칠칠맞게 줄줄 흘린 커피 자국을 아무도 모르게 사르륵… 감춰 주는 것… 나에게는, 중동의 신비한 마법을 가진, 아직도 이렇게 두근두근 가슴 뛰게 만드는 것… 그가 준 마법의 양탄자가 있다.


너무 많은 걸 받았다. 지저분한 속세의 가격으로는 엄청났겠지만, 남의 눈에 보이지않게 꽁꽁 숨겨둔 심장 박동 속 그 설렘은, 양탄자가 아니라 온세상 양떼를 다 줘도 커버할 수 없을 만큼 많고, 크고, 따뜻하고, 포근했다. 끝없는 초원에 한뭉텅이씩 날아드는 꽃가루처럼, 양털처럼… 잊을만하면 한번씩 그리움을 두드린다. 딱 다치지 않을 만큼만, 가볍고 가렵게… 아프고 슬프게… 기쁘고 가쁘게… 그가 온다.


**************


미국 유학 시절, 같은 학교에서 국제 정치학 (International Politics) 전공하던 사람이 있었다. 언어 교육을 공부하던 나하고는 별로 볼일이 없었지만, 같은 대학원생이다보니 여기저기에서 스쳐 지났다. 캠퍼스가 아무리 넓어도,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한눈에 들어왔다. 유난히 팔다리가 길고 키가 큰 – 덩치도 약간 큰 편인..?? – 마네킹같은 남자 두세명이 항상 그를 따랐다. 날카롭게 경계하는 그들에 비해, 그는 절대 어디 한군데 쳐다보는 일 없이, 아무하고도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유령처럼 싸늘하게 지나가는 걸로 유명했다.


“너도 알리 알지? 아까 반대편에서 이쪽으로 걸어 오는데, 우와, 나 진짜 쫄았어. 혼자 괜히 무서워서, 잔디밭으로 이렇게 빙 돌아서 갔다니까. 표정 장난 아냐. 소름 끼쳐.”


사우디의 몇번째 왕자쯤 된다고 했다. 뭐 남자 형제만 한 수십명은 될테니, 서열로 따지면 왕이 될 가망은 전혀 없을테지만, 멀리 미국까지 왔어도 관심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의 보디가드들은 무려 자동차 세대로 나뉘어 다녔다. 계절에 상관없이 늘 정장을 입었고, 그중 제일 가까이에서 모시는 (?) 두어명은, 수업이 끝날때까지 강의실 문 앞에 장승처럼 우뚝 서있었다. 교수님과 함께 모두가 우르르 몰려나가고 주위가 좀 한산해져야, 겨우 그가 움직였다.


절대 누구와도 이야기 하지 않았다. 더더군다나 여자는 – 설령 교수라 하더라도 - 눈도 안 마주쳤다. 종교 때문이기도 했고, 왕족이라 그렇다고 했다. 프로젝트도 혼자서만 하고, 발표도 교수방에서 따로 한다고 들었다. 가뜩이나 빳빳한 고개를 바짝 세우고 눈은 반쯤 내려 감아, 어디를 보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멀찌기에서부터 그를 발견한 학생들이 알아서 길을 터준다. 바닷물 갈라지듯 스물스물 복도가 넓어졌다. 그렇게 해달라고 먼저 요구하지는 않았을거다. 또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었을 거다. 그냥 어쩌다보니… 아마 그 왕족 일행은, 사람 간을 쫄게 하는 뭔가가 있는 듯 했다.      


“사우디 남자들이 원래 저렇게 몸이 좋아? 안에 총, 칼 다 차고 있는 거 아냐?”

“방탄 조끼 입고? 크크.. 가서 한번 물어봐, 바지도 방탄인가?”


없는 자리에서 슬쩍슬쩍 뒷담화도 하긴 했지만, 누구도, 아주 괘씸할만큼 씹을 용기는 없었다. 조심해라, 학교 가다가 칼 맞는다… 뭐 그정도 농담이야 이해할거라 믿었다. 그러나 같은 나라에서 온 학생들은 절대 정색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바로 불편해 했다. 하필 미국, 하필 보스톤, 하필이면 이 학교를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조심스럽다고 했다. 사우디였으면, 그가 지나가는 시간에 맞추어 신호등도 바뀌는, 그런 존재란다.


“에이, 설마… 너 사우디에서 변호사였다며? 그러면 꽤 높은 거 아냐?”


사우디 출신의 아메드에게 물었다. 말 많고 성격 좋은 그는, 외국인 학생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아메드의 가족 역시 뒷마당에 유전이 두개쯤 되고, 남자 형제들이 사는 집이 이곳 대학의 도서관보다 크다고 했다. 방이 너무 많아 끝까지 다 세어 본 적도 없고, 하인이 몇인지도 모른다. 자가용으로 이동하는 마당 반대편의 다른 집에는 여자 형제들이 사는데, 역시나 그 숫자를 세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매일 아침 ‘어머니들’께 안부 인사를 드리는데에만 두시간이 걸린다니, 뻥치지 말라고 웃던 우리에게 그가 덧붙였다.  


“그러니까 나는, 공부 많이 해서 좋은 대학 나오고 일 하는, 그런 계급인거야. 정말 높은 사람들은 아예 일을 할 필요도 없어. 사우디에서는, 나 같은 사람은 ‘저런 분’ 하고 같은 공기로 숨도 못 쉬어.”


오래지 않아, 아메드의 말을 눈으로 확인했다. 일본에서 온 여학생 하나가 살해 당하는 사건이 있었고, 학교 도서관 앞에서 학생회 주최의 추모 모임이 열렸다. 일본에서는 죽은 사람에게 종이학을 접어 준다고 했다. 모임 맨 앞 쪽에 기다란 테이블을 놓고, 네모 반듯한 종이를 줄맞춰 놓았다. 그녀에게 마지막 가는 선물을 남기는 의식이었다. 학생들 뿐 아니라 동네 사람들도 들렀다 갔고, 즉석에서 종이 접는 법을 배우느라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놀랍게도, 그 분 - 알리가 그곳에 나타났다. 일부러 오려고 했던 건 아니었을 거고, 다른 일 때문에 도서관에 왔다가 나오던 길인 듯 했다. 비서들이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하는 것 같더니,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한걸음, 한걸음을 따라, 잔디밭을 지나 종이학 접는 테이블까지 스르륵… 길이 열렸다. 덩치 큰 보디가드들 때문인지, 아니면 눈동자도 보이지 않는 그의 싸늘한 표정 때문인지… 누구도 감히 인사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피해자를 위로하는 건가요? 제가 뭘 해야 하죠?”


입을 꼭 다문 그를 대신해, 비서 중 한 사람이 물었다. 학생 회장인 아메드는 진작에 저 구석으로 도망가 숨다시피 찌그러져 있었고, 대신 일본 학생이 나서서 설명했다.


“피해자와 그녀의 유가족을 위해 짧은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여기 이렇게 종이를 접어서 학을 만들어요. 장례식장에 걸어 놓거든요.”


남자가 메모장에 아랍어로 무어라 쓰고, 기도를 드리는 것 같았다. 뒤에 조금 떨어져 있는 알리와 그의 일행도 조금의 미동도 없이 차렷 자세로 서있었다.

“미스 신, 나 대신 종이학을 하나 접어 줄 수 있습니까?”


기도를 마친 남자가, 부근에 서있던 나를 불렀다.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데에 깜짝 놀라긴 했지만, 왔다갔다 몇번 본 적도 있었고, 어렵지 않은 부탁이라 순순히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순간 놀랍게도… 어쩌면 아주 당연하게… 나도 모르게 정말 자연스럽게… ‘그 분’을 향해 목례를 했다. 이게 뭔 일…?? 아차 싶었다. 여지껏 단 한번도 ‘그분’과 인사라는 걸 해 본 적 없었는데.. 그리고 나보다 나이도 좀 어릴 것 같은데 왜 갑자기 그랬는지… 나도 당황스러웠다. 이런… 왕족의 얼음장같은 포스에 눌려 컨트롤 당하나 싶었다.


얼른 돌아서서, 죽은 친구가 좋아했다던 옅은 하늘색 종이를 골랐다.

‘인사하는 걸 봤나? 미쳤어, 알지도 못하는데 고개 숙여 인사를 하다니.. 에이, 괜찮아, 어차피 날 모를거야..’


일본 종이학은 한국 종이학하고 접는 법이 좀 다르다. 한국이 좀 더 손이 많이 가고 단단하게 접는다. 꼼꼼히 잘 만들어진 한국식 종이학을 비서에게 내밀었다. 그가 두 손으로 받아 실에 꿰어 일본 친구에게 건넸다. 그리고 조용히, 그를 모신 거구들의 일행이 사라졌다. 잔뜩 긴장했던 아메드가 다가왔다.


“으아, 소운, 나 놀란거 보여? 저 분이 올거라고는 생각 못했어.”

“그렇다고 한마디도 못하냐? 네가 나이도 더 많지 않아?”

“그래도 그런거랑 상관없어. 저 보디가드들 안 보여? 쟤들은 언제든지 내 목을 댕강 할 수 있다고.”       


세상에서 가장 쓸쓸하고 조용했던 장례식이 끝나고, 외국인 학생들에게 이매일이 왔다. 그 죽은 친구가 저녁 수업 후에 혼자 자취집으로 돌아가다가 사고를 당했기 때문에, 유학생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가지 의견들이 나왔다. 그 중 하나가 카풀이었는데, 봉사자들이 학교 밖에 사는 외국인 학생들을 집까지 데려다주는 거였다. 주로 비슷한 방향으로 가는 미국 학생들이거나, 뉴스를 보신 동네 교회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다.


외국에서 유학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차가 없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았다. 하지만, 유학 오기 전에 이미 외국 생활을 오래했던 나는, 심심한 학교 쪽이 아니라 조금 복작복작한, 쇼핑몰 근처가 좋았다. 학교나 학생회를 통해 구한게 아니고, 동네 신문 광고를 보고 현지인의 룸메이트로 들어간 거였다. 중간에 버스도 한번 갈아타야하는 곳이라, 그다지 가깝지는 않았다. 그런 상황이 터지니 누굴 믿기도 위험하고, 사실은 귀가 시간도 일정하지 않은 탓에 카풀 서비스를 신청하지 않았다.


며칠 후, 학교 사무실로부터 새로운 이매일이 왔다.

‘당신의 카풀 파트너가 지정되었습니다. 이름은 ***** 전화번호 ***-***-**** 으로 연락하세요.’


모르는 이름에 모르는 번호다. 카풀을 신청한 적도 없고, 할 생각도 없다고 답을 보냈다. 오피스에서는, 학교에서 권장하는 일이며 안전을 위하는 것이니, 가능하면 카풀을 해줬으면 좋겠다, 제공자와 직접 이야기 해 보라…. 고 했다. 할 수 없이, 거절하기 위해,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미스 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디 입니다. 오늘부터 모시러 가겠습니다.”


추모 모임에서 종이학을 접어 달라던, ‘그분’의 비서, 사디였다. 꼭 카풀을 해야한다고 했다. 자기가 많이 곤란해 질 수 있는,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정말 그 날부터, 사디가 아침 저녁, 집으로, 강의실로… 데리러 왔다. 그가 운전하는 검은 차를 타면, 그 뒤로 나머지 두대가 따라 붙었다. 불편하지만 거절하기 힘든, 호의로 보이지만 썩 유쾌하지 않은… 카풀을 가장한 스토킹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걱정 마세요. 사실 남 일에 신경쓰시는 분이 아닌데, 미스 신에 대해서는 좀 관심있어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별 일 아니구요, 위험해서 모셔다 드리는 것 뿐입니다.”


‘그런 것 뿐’ 이라더니, 거짓말이었다. 한번 두번… 사디는 점점 다른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처음 몇번은 집에서 멀지 않은 조용한 프렌치 레스토랑이나 일식집이었는데, 예약해 놓은 방으로 들어가면 ‘그 분’이 먼저 와 있었다. 마음대로 먼저 주문해 놓은 음식이 들어오고, 술을 마시고 식사를 하면서도, 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차 안에서 사디에게 부탁했다.


“정말 한마디도 안하신다니까요. 내 쪽은 쳐다도 안보구요… 저 그냥 집으로 바로 가면 안될까요? 카풀도 못하겠어요.”

“죄송합니다, 미스 신. 그런데 당신이 아니면 그분은 매일 혼자 식사를 하십니다. 끼니도 자주 거르시고, 호텔 방 안에만 계세요. 불편하셔도, 시간을 좀 함께 보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의 의도는 아니지만, 그냥 아르바이트라고 생각해 주세요.”   


그랬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학비가 모두 지불 되어있었다. 꽁돈을 받을 수는 없으니,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마음을 다독였다. 대화 할 친구 하나 없이 늘 경호원들과 다니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앉아있는 것도, 가벼운 인사말을 건네는 것도 어렵고 어색했지만, 하다 보니 나 혼자서도 잘 떠들고 있었다. 학교 이야기도 하고, 교수 욕도 하면서, 나는 그를 님 (Sir) 이라고 불렀고, 그는 나를… 한번도 부르지 않았다... 물론, 쳐다보지도 않았다. 뭐, 그냥 저냥… 차라리 다행이었다.


“습관이라는 게, 참 신기해요. 정말 많이 이상하고 어색했는데,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요. 당신도 내가 시끄럽거나, 불편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는 다운타운에서 살았는데, 날이 추워지면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실내에서만 지낸다고 했다. 학교도 제꼈다. 비가 오면 비가 와서, 눈이 오면 눈이 와서, 얼음이 얼면 얼음이 얼어서, 수업을 빠졌다. 학교와 어떤 딜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여전히 그가 보내는 차를 타고 학교에 갔다가, 그가 혼자 사는 방 세개짜리 럭셔리 스위트 룸으로 ‘출근’을 했다. 사디가 알려준대로, 그가 좋아하는 자동차에 관한 책이나 여행 잡지를 들고 가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어쩌다 한번씩, 그의 입가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엷은 미소를  때도 있었다.  


“사우디에서는 무슨 차 타요? 난 차를 잘 모르지만, 아우디는 상표가 동그라미 네개잖아요. 상표만 보면 그게 제일 예쁜 것 같아요. 아니면 재규어…? 성능 같은 건 어차피 잘 모르니까, 승용차보다는 SUV 가 좋아요. 아, 사우디는 기름값이 좀 싸겠죠? 아닌가? 미안해요, 안 가봐서 아는게 없어요.”  


혼잣말에 도가 텄다. 그래도 자동차 잡지를 보면서, 조금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거의 대부분, 양팔 벌려 좌로 우로 이만큼씩 떨어져 있었지만, 영화를 본다거나, 사진 같은 걸 들여다 볼 때는 옆으로 바짝, 옮겨 앉았다. 그는, 싫어하거나 불쾌해하지 않았다. 꼿꼿하고 빳빳하기만 하더니 조금씩 긴장을 풀었다. 소파 끝으로 비스듬히 기대기도 하고, 테이블에 다리를 올리거나, 몸을 뒤로 한껏 제껴 반 누워있기도 했다.


중얼중얼 내가 책 읽어주는 소리를 들으며, 어떤 때는 소파에서, 어떤 때는 침대에서 혼자 잠이 들기도 했다. 어깨를 살짝 지나는 검은 곱슬 머리와 정말 길고 짙은 속눈썹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불을 덮어주고나면 내 집으로 퇴근했다. 문 닫는 소리에 잠깐이라도 잠이 깼겠지만, 그렇다고 날 잡은 적은 없다. 내 이름을 부르고, 다시 잡아 앉히고, 책 더 읽어라, 더 있다 가라, 자고 가라 …라고 말을 한다는 건, 비서 없이 혼자 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다.


*************


날이 풀리고, 시험이 끝났다. 평소처럼 사디가 데리러 왔다. 쇼핑을 간다고 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재규어 매장이었다. 카 쇼핑이다. 여전히 나와 눈 한번 마주치지 않았지만, 먼저 골라 놓은 SUV 에 어떤 색이 어울릴지, 내 의견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검정은 무겁고, 하얀색은 흔하다… 약간 푸른빛이 도는, 매탈릭한 실버가 멋지다고 했다. 사디가 뒷일을 처리하는 동안, 다른 비서가 의자 커버를 부착했다. 특별히 주문해서 수공으로 만들어진, 한눈에 봐도 아주 고급스러운 양탄자 같은 세트였다. 나를 옆자리에 태우고, 처음으로, 비서가 아닌 그가, 운전석에 앉았다. 그리고 곧장, 보스톤을 벗어나 로드 아일랜드 끝자락의 작은 마을까지 달렸다.


아무것도 없이, 가져 온 거라고는 책가방과 지갑 뿐이었지만 걱정 없었다. 나에게는 그가 있었다. 자그마한 동네 잡화점에 들러 필요한 것들을 샀다. 싸구려 도너츠와 콜라, 갈아입을 옷가지, 슬리퍼, 잡지책 몇권과 아이스 커피… 밤에 먹을 벤 & 제리 아이스크림… 해변가 절벽의 저택 하나를 통째로 빌려, 아래층은 비서들이 썼다. 그와 나는 나란히 붙은 이층 방 두개를 썼다. 뻥 뚫린 바다 쪽으로 향한 통창 밖으로 나가, 이층을 한바퀴 쭉 둘러싼 발코니를 맨발로 걸었다. 커플 의자에 앉아 그가 평생 몇 번 먹어보지 못했을, 도너츠를 권했다. 처음으로, 손으로 도너츠를 집어먹고, 빨대로 아이스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보았다. 파인트 통을 열고 아이스크림을 퍼먹었다.


내 계획에는 전혀 없었던, 4일 간의 휴가였다. 정말 푹 쉬었다. 보통 사람들처럼, 바닷가를 걷고, 영화를 보고, 라디오를 듣고, 요리를 하고, 보트를 탔다. 바로 아래층에 24시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둘만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맥주 캔을 따주거나,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듯 쓰다듬었다. 보트에 오르고 내릴때 꼭 잡아 주었고, 샤워 후 머리 말려주는 걸 좋아했다. 마지막 날 이른 아침에, 일출을 보느라 발코니에 섰다. 자기가 입고 있는 가운을 열어 나를 감싸 안았다. 오래도록, 그렇게 있고 싶었다.


“고마워요. 여기 온 거, 평생 기억 날 거에요.”


뒤에서 안고 서있는 그의 어깨로 머리를 기댔다. 좌로 우로.. 조금씩 머리를 움직였다. 좌로 우로, 도리도리... 천천히 도리도리… 그가 고개를 숙였다. 검정 곱슬머리가 내 귀가 닿고, 두 볼이 스치고, 입을 맞췄다. 아주 오랜, 첫 키스를 나눴다. 내 나이 서른에, 화려한 아침 해가 떴다.


마법의 양탄자에 올라앉아, 보스톤으로 돌아왔다. 다른 연인들 처럼, 왼손으로 운전하는 그의 오른 손을 꼭 잡고 행복했다. 호텔로 가지 않고 내 자취방 앞에 차를 세웠다. 그가 몸을 기울이고 조심조심 살살, 그러나 진한 키스를 했다. 목걸이를 걸어준다. 처음으로, 그가 내 눈을 보며 말했다.


“미안해요, 여기까지에요. 당신을 무척 많이 사랑하지만, 내 욕심 때문에 당신이 불행해져서는 안됩니다. 난 사우디에 가족이 있습니다. 저녁 비행기로 돌아가요. 당신이 많이 그리울 거에요..”                           


 ************


띵… 이매일이 왔다. 내가 세번째 부인이 되어 줄 뻔 했던 그 남자는, 아직도 지구 저쪽에서 가끔씩 매일을 보낸다. 그가 남기고 간 자동차, 양탄자 같은 방석 세트, 목걸이… 오래되어 차는 이제 폐차 직전이지만, 양탄자와 목걸이는 아직도 새것처럼, 깨끗하게 잘 보관하고 있다. 마법이 남았다면, 너무 많이 나이 먹기 전에, 아니면 서로 못 알아볼 만큼 다 변해버리기 전에, 꼭 한번 다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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