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행복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초등학생 시절, 학교 뒷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네잎클로버가 많다는 소문을 듣고 하교 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세잎클로버 속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발목이 저릿해질 때까지 미련하게 네잎클로버를 찾았습니다. 해가 뉘엿해질 때쯤,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 마냥 네잎클로버를 손에 들고 '심봤다'며 소리쳤죠. 당장 집에 들고 가 어머니에게 자랑하며 두꺼운 위인전 사이에 꽂아 소중히 보관했습니다.
누구나 그렇듯 그 네잎클로버에 대한 기억은 몇 개월을 가지 못하고 희미해졌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찾고 소중히 다루리라 다짐했는데도 말이죠. 단지 그것을 발견한 순간 '행운'이 내 삶에 가득 찾아올 것을 기대하나, 생각보다 쉽게 찾아오지 않는 행운에 그 네잎클로버의 존재는 잊혀 갔을 것입니다.
우리는 네잎클로버를 책갈피에 꽂으면서, 별똥별에 소원을 빌면서, 기도를 하면서, 준비된 '행운'을 바란 것일까요, 노력하지 않는 삶에서의 '요행'을 바란 것일까요? 저는 행복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그러한 의심이 들었습니다.
철저히 행복은 선택적인 결과입니다. 내가 행복하고자 하면 행복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불행할 수 있습니다. '행복'의 꽃말을 가진 세잎클로버를 잔뜩 눈에 담고 편안한 하루를 보낼 것인지, 아니면 '행운'의 꽃말을 가진 네잎클로버가 없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실망할 것인지는 당신의 선택입니다.
더불어, 도처에 흔히 깔린 세잎클로버를 꺾다 보면 우연히 네잎클로버가 눈에 띄는 순간이 분명히 올 것입니다. 행운이란 것은 행복한 자에게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행복'의 꽃말이 '행운'의 꽃말에 뒤쳐진 사회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현대 사회의 우리는 복잡한 세상 속에 살고 있느니 만큼,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희소한 것들에 목매달지 않고 흔한 것을 의식하여 행복을 찾고, 그 행복 속에 숨어있는 행운을 떠안아 다시 행복의 크기를 키우는 선순환을 만들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행복은 당신의 선택에 따라 찾아오거나 찾아오지 않기도 하는 인격체와 같습니다.
오늘도 길을 걸으며, 두 발바닥이 땅에 닿는 느낌과 휘젓는 두 팔을 의식해보십시오. 끝을 알 수 없는 하늘과 시원한 공기를 의식해보십시오. 또한 날씨가 춥다면 따뜻한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어 느껴지는 온기를 의식해보십시오. 이것으로부터 작은 감사를 느낄 수 있다면 당신은 오늘 충분히 많은 세잎클로버를 찾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