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코아 Jun 25. 2024

회식이 너무 버거운 신입사원입니다.

2018.03.14(수)


어느덧 회사 생활 세 달 차에 접어들었다. 이번달까지 잘 넘기면 수습기간이 끝난다. 수습기간 동안은 정상임금의 80%만 받고 월차도 쓸 수 없다. 그리고 실제로 그럴리는 없겠지만 명목상 해고당할 수도 있는 기간이다. 그래서인지 아직 회사 조직 안에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일기도 했는데, 다음 달부터는 떳떳하게 정직원이 된다고 생각하니 기뻤다.


업무도 차차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구매부 업무 특성상 메일과 전화를 주고받는 일이 많았는데 아직 영어메일을 쓰는 것과 영어 전화를 받는 것에 있어서는 두려움이 일고 부족함이 있기는 했지만 처음보다 많이 자연스러워졌다. 더군다나 대략 구매부의 업무가 전반적으로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 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과, 내게 주어진 일을 실수 없이 잘 해내고 있다는 게 크게 뿌듯함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여전히 어려움은 남아있었다. 회식이 그랬다. 업무적으로 연관된 부서가 많다 보니 사내 회식도 많았고, 업체들과 거래를 하다 보니 사외 회식도 많았다. 신입사원으로서 바짝 긴장한 채 모든 회식을 참석하다 보니 에너지 소모가 컸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꼭 회식이 있었는데, 집에 돌아오면 10시, 11시는 기본이었다. 체력은 점점 고갈되어 갔다. 그러다 사건이 터졌다.






2018.04.04(수)


우리 부서엔 유명한 대리님이 계셨다. 흔히 다른 부서에선 그 대리님을 비선실세라고 부르곤 했다. 대리님이 그렇게 불리게 된 데에는 부서 특성, 부장님 성격, 구조 모두가 한몫했다.


부장님은 너무나 인자한 분이셨다. 부장님이 큰소리를 내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타 부서와 많이 부딪혀야 하는 구매부였다. 부서의 목소리를 낼 줄 아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 역할을 대리님이 맡았다. 대리님은 업무능력도 좋았고, 일에 대한 욕심도 있었다. 타 부서와의 논쟁이 생길 때면 앞서서 의견을 피력하다 보니, 타 부서 사람들은 그녀를 비선실세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래도 내 눈에는 그런 대리님이 멋있어 보였다.


하지만 장점만 가진 사람도 없고, 단점만 가진 사람도 없다. 내게는 힘든 사수였다. 좋게 말하면 내 능력을 잘 평가해 주신 거고 나쁘게 말하면 신입에게 과도한 업무를 맡겼다. 아직 수습인 나에게 3명이 나누어서 하고 있던 부서 리포트 3개를 모두 맡겼다. 월초, 월중, 월말에 각각 배포해야 하는 리포트였기에 내게는 숨 쉴 여유가 없었다. 다행히 나는 업무 습득이 빠른 편이었다. 그리고 완벽주의자 성향이 있어 주어진 일을 못해내는 것을 극도로 못 견뎌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해내기는 했지만 버거운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건 괜찮았다. 업무니까. 그러나 사건이 벌어진 그날은 다른 문제였다. 퇴근 후 동기들과 저녁을 먹고 있었다. 전화 벨소리가 울려 확인하니 대리님이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네. 대리님. 안녕하십니까."

"응. 뭐 하고 있었어?"

"동기들과 식사 중이었습니다."

"아, 그래? 저녁 먹고 무슨 일 있어?"


나는 이 순간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원래 스케줄은 밥을 먹고 나서 탁구를 치러 갈 생각이었다. 운동도 할 겸 탁구 수업을 등록했는데 오늘이 첫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아, 탁구를 치러 가려고 하긴 했는데, 왜 그러십니까?"


나는 머뭇거리며 답을 했다.


"중요한 거 아니면 나올래? 같이 술 한잔 하자고."

"네. 알겠습니다. 몇 시에 어디로 갈까요?"


이제 겨우 수습 딱지를 뗀 내가 부서의 실세인 그녀를 거부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동기들의 위로를 뒤로 한 채 눈물을 머금고 약속장소로 나갔다. 거기엔 예상외의 인물도 함께였다. 대리님 외에 타 부서 대리님과 대리님 남편이 함께였다. 나는 절로 긴장이 되어 침이 꼴깍 넘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어색한 인사를 깍듯이 건넸다. 타 부서 대리님이 참석한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대리님 남편이 함께 있다는 건 미리 알지 못했다. 대리님 남편도 우리 회사 출신이다. 몇 년 전에 퇴사하셨고 지금은 다른 일을 준비 중이신 걸로 알고 있다. 타 부서 대리님과 형, 동생 하는 친한 사이라 함께 참석한 거라고 했다.


그렇게 술자리는 시작되었다. 평소라면 융통성 있게 몇 잔쯤은 넘겼을 테지만 소규모 인원의 회식이다 보니 그러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눈초리가 따가웠다. 뭔가 분위기가 싸했다. 술자리가 이어질수록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코코아씨는 메일을 쓸 때 좀 조심해서 써야겠어."


평소 일할 때 외에는 사적인 말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타 부서 대리님이 내게 대뜸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당황해서 어떤 말도 수 없었다. 대신 비선실세 대리님이 나섰다.


"왜요? 뭐가 문젠데요? '부탁드립니다.'가 아니라 '요청드립니다.'로 안 써서 그래요?"


그러고는 그들끼리 웃었다. 나 혼자 동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퓨어하게 회식을 하자고 나를 부른 건 아니라는 느낌이 확실히 들었다. 그러자 나에게 의도적으로 술을 먹이고 있는 것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세 명이 주는 술을 모두 마셔야 했지만 그들은 아니었다. 이건 대리님의 계획이었으리라. 정직원이 나를 시험해보고자 건지 아니면 나를 확실히 자신의 밑으로 깔고 가려고 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남편과 자신의 남편과 가장 친한 타 부서 후배를 불러서 내게 술을 먹이는 건 분명 의도가 있다.


하지만 내게 무슨 힘이 있겠는가. 지금에야 저런 식으로 했다면 요령이 있으니 일차만 끝나고 돌아갔겠지만(물론 주는 족족 술을 받아 마시지도 않았을 거고) 새파란 새내기였던 나는 이차, 삼차까지 끌려갔다. 그리고 기억을 잃었다.


다음날 알람소리에 눈을 떴는 데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속은 매스껍고 머리는 무겁고 몸을 제대로 일으킬 수도 없었다. 어떻게 회사까지 갔는지 모르겠다. 회사에 가서도 숙취는 심각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몸이 내 몸이 아니었다. 팔다리는 무겁고 머리는 깨질 것 같고 속은 울렁거렸으나 토는 나오지 않았다. 키보드를 두드릴 힘도 없었다. 툭 치면 픽 하고 쓰러질 것 같았다. 사시나무 떨듯이 온몸이 떨렸다. 삭신이 쑤시고 눈앞이 흐렸다.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 와중에 대리님이 나를 불렀다. 속이 괜찮냐고 했다. 나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견딜만하다고 답했다.


"어제 네가 몸도 못 가누더라고. 남편이 그냥 택시 태워 보내자는 걸 내가 기숙사까지 데려다줬어."


너무나 황당한 말이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모르겠었다. 남편이 그냥 보내자고 했음에도 집까지 데려다줬다는 자신의 선행에 고개 숙여 감사라도 하라는 뜻일까. 숙취 때문에 몸이 아파 꼬아서 듣는 건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저 말이 자신의 남편 험담을 하는 걸로 밖에 안 들렸다. 속으로 욕지거리가 나왔다. 당연히 당신들이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먹였으면 집까지는 데려다줘야지. 그럼 지금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버리고 가자고 한 남편이 정상이란 말인가.


지금 생각하면 정말 바보 같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너무 아파서 병원 좀 다녀오겠다고 쉽게 말을 꺼낼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점심시간까지 버티다 일어서는 순간 휘청이며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러다간 죽겠다 싶었다. 그제야 나는 대리님에게로 가서 병원을 좀 다녀오겠다고 했다. "어제 내가 너무 많이 먹였나. 그렇게 힘들 몰랐네."라며 그녀는 허락했다.


수액이 든 링거를 팔에 꽂고 누웠다. 술 때문에 기억을 잃은 것도, 숙취가 이렇게 심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도, 술 때문에 링거를 맞은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또르르.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떨어졌다. 괜스레 서러웠다. 나는 그저 신입사원일 뿐인데,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이런 테스트 관문을 통과하는 건지. 다들 이렇게 회식자리에 불려 나가서 괴롭힘을 당하는 건지. 억울하고 화가 났다.


퇴근 후에서야 룸메에게서 전날 밤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나는 일차 이후로 기억이 완전히 끊겼다.) 새벽 한 시 반쯤 누군가 계속 도어록 비번을 누르는데 틀려서 삑삑 소리가 났다고 한다. 그 소리에 깬 룸메가 나와서 문을 열었더니 대리님이 나를 데리고 서있더란다.


"내가 좀 많이 먹였다." 이 한 마디와 함께 대리님이 날 룸메에게 넘겨주고 갔다. 룸메는 인사불성이 되어 몸도 못 가누는 나를 겨우 데리고 내 방으로 눕혔다. 그러자 내내 참고 있던 눈물을 나는 터뜨렸다. 너무나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힘들다고. 일이 너무 힘들다고. 대리님이 너무 무섭다고. 그 폭포수 같은 눈물에 룸메도 같이 울었단다. 언니가 불쌍하다고.


사실 입사 전 동기모임에서 '구매부에 입사하는 신입사원이 제일 불쌍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말이 피부에 와닿는 순간이었다. 이날의 사건을 난 잊지 못한다. 그리고 결심했다. 능력으로 존경받는 사수가 되기에 앞서 인성으로 존경받는 사수가 되겠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