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나온 집들

by 아치

남편과 나는 지방 출신이다. 나는 충남의 한 시골 마을에서, 남편은 경상도에서 나고 자랐다. 고등학교까지 그곳에서 다니다 대학을 서울로 오면서 고향을 떠난 것도 똑같다.


다만 내 고향은 '읍'이고, 남편은 '면'이다. 읍민과 면민은 엄연히 다르므로 이건 밝혀두어야 한다. 크게 보면 남편은 광역시에 속한 면이고, 나는 군에 속한 읍이기에 남편은 내가 더 시골 출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우리 집은 논밭을 보려면 차를 타고 나가야 하지만 너희 집은 대문만 나서면 논밭이지 않느냐, 하고 사람이 근본을 잊으면 안 된다고 남편을 타이른다.


대학을 오기 전까지 내 평생 이사는 딱 한 번이 전부였다. 원래 살던 집에서 불과 10초 떨어진 곳에 아빠가 새로 지은 집으로. 하지만 서울로 오면서부터는 이사가 생활이 되었다. 처음 대학에 입학하고 1년 반 동안 살았던 기숙사를 시작으로 하숙집과 자취집, 고시원과 공부방, 친구와 함께 산 집 등 수시로 이사를 했다. 단출한 이사를 위해 당시 내가 세운 원칙은 짐이 ‘우체국 6호 상자 세 박스를 넘지 않을 것'이었다.


결혼 후에도 이사는 계속되었다. 11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을 하고 신혼집을 고를 때에는 서울 지도를 펼쳐 놓고 위치를 고심했다. 가족이 가까이에 있다면 그 근처를 고려했겠지만 양가가 다 멀었다. 서울에 연고가 없다 보니 선택지가 너무 많았다. 당시 나의 직장은 종로였고, 남편은 경기도 중부였다. 집을 보러 서울 곳곳의 부동산을 다녔다.


집 구하기에 지쳐갈 즈음 부동산 직거래 카페에 올라온 매물 하나를 보게 되었다. 은평구에 있는 오래된 15평 빌라였다. 전셋값이 저렴하고 은평구면 우리 둘이 출퇴근하기에 위치도 나쁘지 않았다. 그날 보고 가계약을 걸었고, 그 집이 우리의 신혼집이 되었다.


전셋값이 저렴했던 이유는 건물이 오래되고 언덕 꼭대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2년 만기 뒤에도 집주인이 전셋값을 올리지 않았기에 우리는 계약을 갱신해 총 4년을 그 집에서 살았다. 나중에 듣기로는 집주인이 해외에 있던 탓에 전세 만기 전에 연락을 못했다고 한다. 우리로서는 감사한 일이었다. 하지만 4년 뒤 집주인은 전세가를 큰 폭으로 올렸고, 우리는 이사를 가기로 했다.


두 번째 집도 역시 같은 동네로 구했다. 가까이 불광천이 있고, 교통도 나름 괜찮은 데다 은평구는 서울에서 집값이 저렴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엔 다행히 언덕 직전에 있는 집을 구했다. 가까스로 언덕을 피한 것만으로도 나는 대만족이었다. 이곳은 집 겸 남편의 사무실로 쓸 요량으로 실내 인테리어를 남편이 직접 했다.


이삿날을 맞추다 보니 7월과 8월, 가장 더운 때 실내 공사를 하게 되었다. 새로 계약한 집은 신혼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아침에 남편과 같이 집을 나서서 나는 출근하고 남편은 새 집으로 향했다. 남편은 하루 종일 집 공사를 하다가 내가 퇴근길에 들르면 머리에 하얗게 먼지를 뒤집어쓴 채 웃으며 나왔다.


우리는 저녁 식사에 맥주를 겸하며 그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름인 데다가 땀 흘리며 일해서 인지 남편은 맥주가 술술 들어간다고 했다. 원래도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데다가 우리에게 딱 맞춘 집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그런지 남편은 매우 즐거워 보였다.


남편이 상주하다시피 한 두 달여의 실내 공사가 끝나고 나온 결과물은 남편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그전까지는 남편의 작업물을 직접 볼 일이 없어서 '건축가'로서 남편이 하는 말들을 귀담아듣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집에 살면서 남편이 그동안 누누이 말했던 집이 주는 느낌, 공간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전 01화사실은 단독주택이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