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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치 Aug 09. 2022

날카로운 첫 텃밭의 기억

우리가 이사 온 겨울 초입에는 다들 집에 있는지 동네에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남편과 나는 ‘드디어 주택에 오다니’ 하는 감격에 차가운 눈발에 명치를 맞아가면서도 수시로 마당에 나갔다. 그리고 위아래 이웃집들을 유심히 살폈다. 마당에 나와 있는 사람은 없지만 나무에 짚을 감싸고, 외부 수도에 보온재를 둘러놓은 걸 보면 다들 겨울 준비를 단단히 한 게 틀림없다. 우리는 주변 집들을 눈에 잘 담아 두었다. 다음 겨울에는 우리도 저렇게 해야지, 다짐하면서.


그러다 봄이 되자 동네가 복작였다. 여기저기서 뚝딱뚝딱 고치는 소리, 땅을 파는 소리가 들렸다. 겨우내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날이 풀리니 자기 집 마당 정비를 위해 나온 것이다. 혼자 사부작사부작하는 사람도 있고, 가족이 총동원되어 잔디를 심는 집도 보였다. 어디선가 구수한 비료 냄새도 났다. 아랫집도 큰 나무 아래 비료로 보이는 포대를 높이 쌓아 놨다. 동네 사람들이 봄을 맞아 다들 약속이나 한 듯이 말 그대로 ‘삽질’을 하고 있었다.


동네의 인기 장소도 봄이 되자 변했다. 마트 앞 모종 가게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상추, 방울토마토부터 로즈메리, 바질까지 초록 초록한 모종들이 나타났다. 토마토만 해도 방울토마토, 흑토마토, 대추토마토 등 종류가 많았다. 로또 명당 앞에나 있을 법한 긴 줄은 텃밭에 관심 없는 나조차 모종 가게 앞을 기웃거리게 만들었다.


“여기 좀 봐, 모종 엄청 많아.”


까치발을 들고 남편을 부르는데 남편은 이미 사람들을 뚫고 저만치 앞에 가 있다. 노동력과 시간을 생각하면 사서 먹는 게 제일 싸다는 생각에 멀리서 구경만 하는 나와 달리 남편은 전투적으로 앞으로 나간 것이다. 한참 후 인파를 뚫고 나오는 남편의 손에는 적상추, 청상추, 치커리, 케일, 로메인, 방울토마토, 흑토마토, 큰 토마토, 수박, 참외, 오이 모종이 박스에 담겨 있었다.



이것은 남편이 산 모종의 일부분일 뿐이다.



왜 이렇게 많이 샀냐고 하니 주택 마당에서는 모름지기 텃밭을 꼭 해야 한다나. 나는 어려서 주택 살 때도 이런 거 키운 적 없다고 했다가 시골 애가 왜 그런 것도 모르냐고 되려 타박만 들었다. 시골에서 자랐다고 해도 주변이 다 상가였고, 우리 집 마당은 주차를 위해 시멘트로 덮어 놓아 이런 텃밭을 할 공간이 없었다. 엄마가 마당 한쪽 화분에 꽃이나 싹이 난 고구마를 심은 게 전부였다. 남편은 집 주변이 온통 논과 밭이었으니 잘 모를 것이다. 이래서 ‘읍민’과 ‘면민’은 다른 거라고 ‘읍’에서 자란 내가 다시 한번 남편의 출신을 상기시켜 주었다.


탐탁지 않은 내 표정을 읽은 건지 자기가 다 할 테니 걱정 말란다. 그래 놓고는 출근하면서 나한테 흙이 모자라니 더 사다 달라, 퇴비도 사다 놔라, 이것저것 요구가 많다. 함께 사온 배양토가 모자라서 다시 가기를 두 번. 욕심을 부린 충동구매의 결과 텃밭 크기에 비해 모종이 많아 빽빽한 살림이 되었다.


모종은 가격이 저렴해서 저 모든 걸 합해도 1만 원 안팎이었지만 배양토를 사는데 4만 원이 넘게 들었다(후에 흙 두 포대를 또 사고, 퇴비도 뿌려줬지만 이건 뺀 가격이다. 농협 경제부에서 고추 지지대도 사서 꽂아주었다). 혼자 하는 게 안쓰러워 보여 옆에서 돕다 보니 고된 노동에 슬슬 짜증이 났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 아무래도 손해 본 거 같다고 하자 남편은 수박이 두 개만 열려도 이득이라고 항변했다. 마지막에는 본인도 힘들었는지 이렇게 많이 산 줄 몰랐네, 말끝을 흐리며.


모종을 심고 몇 달이 지난 지금 남편이 고대하던 수박은 전멸했다. 오이는 달랑 하나 따 먹었다. 이웃집에서 준 옥수수가 가장 선전하고 있는데 옥수수가 잘 달릴지는 모르겠다. 우리 집에서 가장 선전하고 있다 뿐이지 다른 집들 옥수수에 비하면 잘 안 크고 있는 것 같다. 마을 초입의 옥수수밭을 지날 때면 옥수수가 저렇게 크게 자라는 아이구나, 하는 생각에 우리 집 옥수수가 생각나 눈물이 앞을 가린다.


반면 초반에 시들시들하던 토마토가 의외로 선전하고 있고, 참외는 열릴까 말까 고민 중인 것 같다(열려라, 참외!). 상추는 크게 자라지 않기에 아직 채 자라지 않은 어린것들을 따 먹고 지금은 관상용으로 놔두었다.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자란 건 올해는 글렀다며 일찌감치 포기한 나와 달리 '살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영양 있는 흙을 보충하고 퇴비도 주며 고군분투한 남편 덕분이다.      


오이와 방울토마토. 너무 작아 먹기 미안했던 상추.


남편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텃밭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 사 먹는 게 제일 경제적이라는 생각은 여전하지만 식물이 크는 게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다. 꽃 밑에 오이, 방울토마토가 작게 달리면 열심히 응원하게 된다. 아이 역시 아침이면 마당을 한 바퀴 둘러보고 오이가 열렸는지, 상추에 벌레가 붙지는 않았는지 살펴본다. 토마토를 안 먹는 아이가 직접 토마토가 열리는 걸 보더니 빨갛게 익는 족족 제 입에 넣기 바쁘다.


올해는 텃밭이 처음이고, 잘 모르고 시작해서 그런지 수확이 좋지 않다. 이웃집의 풍성한 텃밭을 보며 내년에는 우리도 좀 더 일찍 삽질을 시작하자고 다짐한다. 미리 구수한 냄새 풍기며 비료도 섞어서 영양 가득한 흙도 만들어 놓기로 했다. 남편은 벌써 내년에 심을 작물을 정하고 있다. 상추, 참외, 수박, 방울토마토, 옥수수, 가만있자, 또… 뭐가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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