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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샨티 Sep 13. 2022

01. 순희와 토끼

01. 순희와 토끼(그림 Elisha   https://brunch.co.kr/@babyhappy)

 집 근처의 조그만 숲길을 산책하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입니다.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한여름에도 그곳에는 초록빛 그늘과 이끼, 오래된 솔향으로 청량함이 그득합니다. 저는 이곳을 ‘철학의 숲길’이라 이름 짓고 은밀하게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비가 많이 올 때는 발걸음이 뜸해지기도 하지만, 이 숲길은 변함없는 제 마음의 연인입니다.     

 인적이 드물고 고요한 숲길을 철학자나 된 양 조용히 걷고 있었습니다. 숲길은 다양한 수종의 꽃과 나무가 있어 심심할 새가 없습니다. 대나무 숲을 지나 숲길의 가장 우거진 곳을 지날 때였습니다. 제 손바닥만 할까요, 아주 조그만 흰 동물이 휙 하고 지나치는 것이 보였습니다. 다람쥐나 고라니와는 가끔 마주쳤지만, 이렇게 희고 조그만 동물은 처음이었습니다. 꼭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제 바람대로 처음 마주쳤던 곳에서 그 흰색 동물과 자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어떤 때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떡하고 두 발로 버티고 서 있을 때도 있었지요.    

 그 동물의 정체는 토끼였습니다. 처음에는 산에서 사는 토끼니까 당연히 산토끼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산토끼는 뭐랄까요, 연한 갈색과 흰색이 뒤섞이고 덩치가 크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 토끼는 순백의 털에, 크기도 대형 머그잔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았습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토끼’라고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오호~, 토끼는 다 같은 토끼라고 생각했는데 인터넷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더군요.

‘토끼는 크게 산토끼와 굴토끼의 두 종류로 나뉜다. 산토끼는 덩치가 크고 굴토끼는 덩치가 작다.’라고 말입니다. 그 토끼는 야산의 숲에서 만났으니 산토끼일 텐데 크기가 산토끼에 대한 설명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그렇다고 굴토끼하고도 똑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생김새야 어찌 됐든 산에서 만났으니 저는 이 토끼를 ‘산토끼’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만나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이 토끼는 ‘야생 토끼가 맞나?’ 하고 생각될 정도로 경계를 풀고 제 옆에 바짝 다가와 앉아 있기도 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짤막한 목에 조그마한 도토리 모양의 펜던트 목걸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죠. 유난히 덩치가 작은 이 토끼는 애완용으로 변종 시킨 토끼인 것 같다구요. 주인이 목걸이를 걸어줄 정도로 예뻐하다가 싫증이 나서 숲에 버렸을 거라고 멋대로 상상했습니다. 이제 저는 토끼를 만나기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 숲길로만 산책합니다.     


 집에서 동물을 키운 경험이 한 번도 없을 정도로 동물에 무관심한 저였지만, 이상하게도 이 토끼가 좋았습니다. 가끔 제가 늦게 가면 왜 늦었냐는 듯이 서둘러 제 옆으로 폴짝하고 다가왔습니다. 당근과 양배추를 가져다주면 오물오물 맛있게 씹어먹는 모습이 인형처럼 귀여웠습니다. 저는 완전히 토끼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잘 있었어? 오늘은 뭐 하고 지냈어?”, “기분은 어때? 난 오늘 조금 우울해.” 하고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말을 걸면, 토끼는 핑크빛 속살이 보이는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제 말을 들어주는 눈치였습니다. 이마를 쓰다듬으려 해도 도망가지 않고 기분 좋은 듯이 머리를 내어주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왠지 모르게 토끼가 여느 때와 달라 보였습니다. 좋아하는 양배추를 주어도 본 척도 안 했습니다. ‘어디가 아픈 건가?’ 하고 생각하는 다음 순간 “묘오오” 하고 토끼가 말을 걸어 오는 듯했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언제나 저 혼자서 말하는 일방통행이었는데 갑자기 토끼가 말을 걸어 오는 듯해 신기했습니다. “토끼야, 뭐라고?” 갓난아기에게 말을 걸 듯 혀짧은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토끼는 “뾰오오오” 하고 다시 신기한 소리를 냈습니다, 아니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습니다. 놀라웠지만 조용히 다음 반응을 기다렸습니다.

“안녕”

토끼가 진짜로 말을 걸어 왔습니다. 순간 저는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껌뻑이다 겨우 말했습니다.

“뭐, 뭐, 뭐라고?”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습니다.

“놀라지 마. 나는 이방토끼라고 해.”

“……!”

 토끼가 말을 하는 것도 놀라운데 ‘이방토끼’라고 자기소개까지 하니까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애써 정신을 차리고 저도 제 소개를 했습니다.

“……어, 어, 그래. 너는 이방토끼라고 하는구나. 나는 순희야, 차순희.” 토끼와 통성명을 나누는 저를 누군가가 봤으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여겼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토끼가 자기소개를 하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헤벌린 채로 지켜볼 수만은 없지 않았겠어요. 토끼는, 아니 이제 이름을 알았으니 이방토끼라고 불러야겠군요. 이방토끼는 “차순희? 예쁜 이름인데.” 하고 제 이름을 추켜세우기까지 했습니다. 이 토끼 정말 토끼가 맞나요? 아니면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요? 아무리 감추려 해도 놀란 표정을 감출 수는 없었습니다. 토끼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제 가슴은 쿵쿵하고 뛰었습니다.     

“놀라지 마. 나는 토끼지만 인간의 말을 할 줄 알아. 산속의 호랑이 굴 벽에 적힌 글을 보고 인간의 말을 배웠어.”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 한편으로는 이상하게도 왠지 또 납득이 됐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요. 토끼도 열심히 배우면 인간의 말쯤은 못 할 것도 없겠다 싶었구요. 묘하게 납득이 가면서도 이상한 기분을 접을 수 없었습니다.

“이방토끼야, 반갑다. 말하는 토끼를 처음 봐서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네가 말하는 것을 직접 보니 토끼라고 말을 못 할 것 같지도 않네. 인간의 말을 하는 앵무새도 있으니까. 어쨌든 반갑다.” 마음을 담아 이방토끼에게 대답했습니다.

“고마워. 순희라면 토끼가 말을 해도 이해해 줄 것 같았어. 지난번에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가 그 사람이 기절하는 바람에 나도 함께 기절해 버린 적이 있었지. 그래서 이번엔 아주 조심스러웠어. 나 순희랑 친구가 되고 싶은데 괜찮을까?”라고 물어왔습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지요. 이렇게 귀여운 토끼가 원하는데요. 그날부터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며 우정을 쌓아갔습니다.          

 나무, 도토리, 당근, 숲, 땅콩, 하늘, 별, 바다, 개, 고양이, 다람쥐, 토끼…….

우리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습니다. 이방토끼가 공부했다던 동굴 벽화에는 얼마나 많은 인간의 글이 적혀 있었던 걸까요? 이방토끼의 입에서는 엄청난 어휘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가끔은 굳이 이렇게 어려운 단어를 써야 할까 하고 생각될 만큼 한자어나 외래어까지 섞어서 이야기했습니다. 서식지, 공생, 공포, 고문, 굉음, 건초, 구애 등 사람인 저도 잘 쓰지 않는 어휘까지. 게다가 페로몬이니 글루밍, 마킹 같은 전문 용어까지 이방토끼는 거침이 없었습니다. 지나치게 멋을 부려 이야기하려 한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이것 역시 이방토끼의 개성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멋져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수다쟁이 이방토끼는 말이 없고 시무룩해 보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나 하고 걱정이 되었지만, 조용히 기다려 주었지요.

“나 곧 달나라로 떠나…….” 갑자기 입을 연 이방토끼는 엉뚱한 말을 꺼냈습니다.

“뭐라고? 어디? 다, 다, 달나라? 저기 하늘에 있는 달나라 말이야?” 이방토끼가 처음 말을 걸어 온 순간만큼이나 놀라 속사포처럼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방토끼와 만나고부터는 말을 더듬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달나라…….”

제 귀에는 분명히 ‘달나라’로 들렸습니다. 달나라라니, 지금 이방토끼는 밤하늘에 떠 있는 그 달에 가겠다고 하는 걸까요? 제 귀를 의심하면서 다시 물었습니다.

“혹시 그거 카페나 레스토랑 이름이야?”

이방토끼는 제 물음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말했습니다.

“나 연필 타고 달나라에 가기로 했어.”

“연필? 연필은 또 뭐야? 연필을 타고 달나라에 간다고?” 숨도 쉬지 않고 물었습니다. 이방토끼는 지금까지의 귀여운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마치 초월한 사람처럼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산에서 내려가면 해변이 있잖아. 그곳에 있는 로켓 발사장에서 달로 가는 연필 로켓이 발사될 거라는 뉴스를 들었어. 나 그 연필에 타기로 했어.”

 어이가 없었습니다. 말을 하는 토끼가 이번에는 우주선을 탄다는 겁니다. 연필이 우주선을 의미한다는 것을 저는 바로 알아차렸습니다. 이방토끼의 말은 유창하기는 하지만 군데군데 문법을 벗어나거나 자신만의 단어로 표현하기도 했으니까요. 어쨌든 말입니다. 토끼가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에 가겠다니 참으로 믿기 어려웠습니다. 전에 이방토끼의 말을 듣고 기절했다는 사람처럼 여차하면 저도 기절해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순희야. 사실 나, 사연이 좀 있어.”

저는 이방토끼의 사연보다도 달에 가야겠다는 연유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방토끼야, 왜 달나라에 가겠다는 거야? 거긴 지구 밖이야. 그곳은 산소가 없어서 우리 같은 산소 호흡을 하는 동물은 살 수가 없는 곳이거든.”

이방토끼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순희야. 이곳도 내게는 외계야. 난 어느 곳에서나 이방인이야, 아니 이방토끼‘異邦卯’지. 그리고 산소가 없어도 괜찮아. 숨을 쉬지 못해서 죽게 되더라도 달나라에 가야겠어. 달나라에서 꼭 해야 할 일이 생겼거든.”

단호한 표정으로 자신은 어느 곳에서나 이방인이라고 말하는 이방토끼의 말에 마음이 아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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