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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샨티 Sep 15. 2022

05. 꿈같은 나날

05. 꿈같은 나날(그림 Elisha   https://brunch.co.kr/@babyhappy)

 꿈같은 나날이었어. 그야말로 ‘내 생의 황금기’였지. 수컷 토끼는 말했어.

“이방토끼야. 사실은 나는 굴토끼란다. 내 고향은 저 멀리 섬나라야. 이곳은 잠시 여행을 온 거라서 나는 곧 돌아가야 해. 내가 사는 섬나라에는 토끼가 많이 있고, 먹을 것도 아주 풍부해. 나는 섬의 어디에 맛있는 토끼풀이 있는지, 어느 양배추밭의 경계가 허술한지 알고 있어. 나랑 함께 섬나라로 가지 않을래?”

순간 나는 당황했어. 이 멋진 수컷 토끼가 굴토끼라니, 나는 산토끼인데 말이야. 인간이 들으면 산토끼나 굴토끼나 같은 토끼 아니냐고 하겠지만, 그건 오해야. 같은 ‘토끼과’ 동물이기는 하지만 모양새나 습성이 상상 이상으로 큰 차이가 있어. 산토끼는 독립성이 강하고 지상 생활을 하지만, 굴토끼는 집단생활을 하며 땅속에 굴을 파서 생활해. 물론 호랑이와 비교하면 그 정도 차이쯤이야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어. 아니 오히려 호랑이들과 만나지 않을 수 있다면 멀리 더 멀리 가고 싶은 마음이었어. 그리고 산에서 발견되기는 했지만 어쩌면 나는 굴토끼였을지도 모를 일이잖아?    

 “수컷 토끼야. 섬나라는 어떻게 생겼어? 그리고 어떻게 그곳으로 갈 수 있어? 난 좁은 곳에서만 살아서 오래 뛸 수 없어.”

 잘 뛰지 못하는 나를 내버려 두고 수컷 토끼 혼자서 가버리지나 않을까 싶어 근심 어린 목소리로 이것저것 물어봤어. 수컷 토끼는 다정하고 똑똑한 토끼였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난 큰잠자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 우리는 그곳까지 가기만 하면 돼.”

큰 잠자리? 왜 큰 잠자리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수컷 토끼의 늠름한 말에 용기가 났어.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너와 함께할 거야. 목숨이라도 내어줄 수 있어. 묘흥.” 하고 행복에 겨워 나도 모르게 호랑이 소리를 내고 말았어. 수컷 토끼는 묘흥하는 소리를 못 들은 건지,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건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 조금만 방심해도 호랑이 짓이 나와서 아슬아슬했지만, 잘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 얼마 가지 않아 호랑이 짓을 잊어버리고 완전한 토끼가 될 자신감이 그때는 있었어.     


 우리는 며칠을 뛰고 또 뛰어 드넓은 광장을 발견했어. 광장에는 잠자리를 닮은 엄청나게 큰 쇳덩이가 하나도 아니고 수십 개가 떼 지어 있었어. 큰 소리를 내며 하나씩 날아오르기도 했지. 나는 몹시 불안해졌어. 호랑이 굴에서 자란 탓인지 토끼의 습성 탓인지 덩치 큰 생명체를 보면 공포감에 털이 곤두서고, 새빨간 두 눈은 더욱 충혈되고, 조그만 코는 저절로 실룩거려졌어.     

“수컷 토끼야, 저게 뭐야? 나, 너무 무서워.”

몸을 웅크리며 무서워하는 나에게 수컷 토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해 주었어.

“저건 인간들이 만든 큰잠자리야. 비행기라고도 해. 덩치는 크지만, 땅을 박차고 날기도 하지. 우리는 저 큰잠자리의 배에 올라타기만 하면 돼. 큰잠자리는 우리를 잡아먹지 않고 무사히 내가 살던 섬나라로 데려가 줄 거야.”

 마음이 놓였어. 늠름한 수컷 토끼가 안심하라고 하잖아. 무슨 말을 해도 믿으리라고 생각했지. 조심조심 인간들이 없는 틈을 타서 큰잠자리의 배에 올라탔어. 한참을 기다리자, 아빠 호랑이의 포효보다도 더 큰 소리를 내며 큰잠자리는 하늘로 날아올랐어. 무섭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서 그저 수컷 토끼의 따뜻한 품속으로 파고들 뿐이었지. 얼마를 날았을까. 또다시 우당탕탕 끼기기긱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아까 올라탔던 곳과 별반 다르지 않은 광장에 내려앉았어. 큰잠자리의 배가 열리자, 어디에 저렇게 많은 인간이 숨어 있었나 싶을 만큼 많은 인간이 우르르하고 몰려 내렸어. 한편에서는 또 다른 인간들이 큰잠자리 배 속의 여기저기를 마킹하는 듯한 행동을 했어. 다들 무척 바빠 보였지만, 익숙해 보였어. 수컷 토끼와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조용히 기다렸어. 암컷 수컷 할 것 없이 많은 인간이 저마다 해야 할 일이 있는 듯 부산하게 움직였어. 이윽고 큰잠자리는 모든 날갯짓을 끝낸 듯 조용해졌어. 수컷 토끼는 ‘이때다’ 하는 듯이 앞발로 신호를 보내며 깡충 하고 뛰어내려 아주 재빠르게 뛰었어. 정말 믿음직하고 멋졌지. 하지만 넋을 놓고 반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어. 나도 서둘러 깡충깡충하고 뛰어야 했으니까.     

 얼마를 뛰었을까. 숨이 헉헉 차도록 한참을 뛰니까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까와는 전혀 다른 드넓은 풀밭이 나타났어. 수컷 토끼는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지.

“이곳이야.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 이곳은 풀도 많고 마실 물도 넘쳐 나.”

험한 산만 보고 자란 내게 드넓은 초원은 꼭 천국 같았어. 꿈이 아닌가 싶어 뒷다리를 사정없이 꼬집어 보았지. 꿈이 아니었어. 하얀 털 밑으로 뒷다리의 맨살이 빨갛게 부어올라 있는 것이 보였으니까.          

 꿈을 꾸는 듯한 행복한 날들이 계속되었지. 꽃이 피는 봄이 오면 수컷 토끼와 매일 같이 꽃놀이를 했어. 색색의 꽃들을 보고 있으면 내 미래가 이 꽃 색깔처럼 아름다울 거라는 생각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어. 벚꽃 잎이 눈처럼 쏟아질 때면 신이 우리를 축복해 주고 있다는 황홀감에 온몸의 털이 춤을 추었어.

 여름은 우리에게 천국이었어. 어디를 가나 토끼풀이 무성해서 먹이 걱정은 내려놓고 마음껏 먹고 놀기만 하면 되었거든. 한참을 풀밭에서 뒹굴다가 깜빡하고 기분 좋게 잠이 들곤 했지. 그럴 때 나는, 내가 죽어서 천국에 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어. 천국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거라고 생각되었어.

 가을은 일 년 중 가장 바빴지. 먹을 것이 없어질 겨울에 대비해서 풀을 뜯어 건초를 만들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건강하고 성실한 수컷 토끼와 함께라면 힘들다고 생각되지 않았어. 오히려 수컷 토끼와 힘을 합쳐 일하는 것이 즐겁기만 했어.

 추운 겨울이 오면 들판에는 풀이 말라서 먹을 것은 귀했지만, 겨울은 겨울대로 또 좋았어. 가을에 비축해 둔 건초를 아껴 먹으며 하는 일 없이 수컷 토끼와 많은 시간을 보내자면 마음이 평온해졌어. 눈이라도 내리면 우리는 연인들처럼 눈밭을 깡충거리며 뛰어다녔어. 한참을 추운 눈 속에서 뛰어놀다가 굴로 들어와서 느끼는 그 아늑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어. 세상 부러울 게 없었지. 따뜻한 굴속에서 건초를 씹으며 도란도란 밤을 새워 가며 이야기했어. 수컷 토끼는 언제나 나를 배려해 주었어. 수컷 토끼의 온화한 성품은 조그만 일에도 깜짝깜짝 놀라고 불안해하는 나의 성격까지도 바꿔주었어.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평화롭고 감미로운 나날이었지.     

 젊은 우리는, 가끔은 사소한 일로 다투기도 했어. 다투고 난 뒤면 수컷 토끼도 나도 긴 귀를 축 늘어뜨리고 슬퍼했어. 하지만 천적이 없는 평화로운 이곳에서 우리는 서로를 배려하며 마음껏 사랑을 나누었어. 그리고 생각했어. 잘 생기고 상냥한 수컷 토끼를 닮은 귀여운 새끼를 낳아서 잘 키우고 싶다고. 운이 좋을 때는 모든 게 내 마음대로 되었어. 내 소원대로 새끼 토끼가 태어났어. 마음 같아서는 번식기 때마다 새끼를 낳고 싶었지만, 아직 섬나라 생활이 서투르고 체력이 약한 나로서는 많은 새끼를 키울 수가 없었어. 암컷과 수컷 두 마리의 새끼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듯이 기뻤어. 엄마 아빠에, 꼬물꼬물 예쁜 새끼까지 있는 그림에 그린 듯한 행복한 생활이었어.

 새끼들은 큰 병 없이 무럭무럭 자라주었지. 아빠가 된 수컷 토끼는 더욱더 열심히 풀과 양배추를 가지고 와 주었고, 나도 새끼들이 잠이 든 틈을 타서 풀을 뜯어오고, 입에 물을 머금고 와서 목마른 새끼들 입을 축여 주었어.

“아아~, 정말 행복해. 더 바랄 게 없어. 이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새끼들과는 바꿀 수 없어.” 하고 행복에 겨워하며 수컷 토끼를 기다렸지. 이때만 해도 호랑이 가족은 완전히 잊어버린 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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