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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샨티 Oct 05. 2023

07. 섬나라 토끼

07. 섬나라 토끼(그림 Elisha   https://brunch.co.kr/@babyhappy)

 호랑이 굴에서는 으르렁거리며 사납게 굴기는 해도 모두의 마음속에는 ‘가족은 일심동체’라는 하나의 가치관이 있었어. 가끔은 피보다 진하다는 그 가치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하고, 때로는 격하게 싸우기도 했어. 호랑이 굴에서 자란 나는 그런 것이 가족이라고 생각해. 가족끼리는 터놓고 고민을 이야기하고, 뒷다리로 걷어차고 싸우기도 해야 정이 드는데, 섬나라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처음에는 호랑이 굴에서와는 다른 이런 것들이 평화롭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가족에게조차 감정을 표출하지 않고, 새끼의 삶에조차 개입하려 하지 않는 섬나라 생활은 진공관 속처럼 답답해서 질식할 것 같았어.     

 섬나라의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함께 하면서도 홀로된 듯한 고립감에 내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어.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고 애를 썼지만, 혼자서 들판을 헤맬 때도, 모두가 잠들어 있을 때도 눈물이 줄줄 흘렀어. 점점 내 눈물의 의미조차 알 수 없게 되었어. 슬픈 감정이 없을 때도, 새끼가 보고 있을 때도, 암컷 토끼들과 풀 다듬는 일을 할 때도 주르륵하고 눈물이 흘려내려 곤란했어. 주책맞은 내 눈물이 창피해서 견딜 수 없었지만, 내 눈은 고장이라도 난 듯이 눈물을 조절할 수 없게 되었어.  

  

 잠을 잘 수도 없었지. 팔베개하고 모로 누워 있자면 눈물이 흘러 한쪽 귀로 들어갔어. 앞발로 얼른 훔쳐보지만, 눈물방울은 내 발놀림보다 빨랐어. 눈물이 귀에 들어가면 먹먹한 게 몹시 불쾌한 느낌이었지. 이런 날이 계속되자 나는 꾀를 내었어. 전날 뜯은 풀을 햇볕 아래에 말려 두었다가 앞발로 조물조물 뭉쳐서 귀에 넣어두면, 건초가 눈물을 흡수해서 귀가 먹먹해지지 않아서 좋았어. 하지만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리니 말려도 말려도 풀이 모자랐어. 매일 같이 뜬눈으로 밤을 새우자니 굴 안 일은 물론이고 그나마 해왔던 공동체의 작은 역할도 할 수 없게 되었어. 옹달샘에 물을 마시러 온 친절한 암컷 토끼와 이야기도 해보았어. 그녀들은 입을 모아 말했어.     

 “이방토끼 씨. 다들 그렇게 살아. 수컷 토끼는 바쁘고, 새끼들은 커가는 거잖아. 그게 삶이야. 유별나게 굴지 마. 그렇게 잠이 오지 않으면 저 개울 건너에 피어있는 이파리 끝이 뾰족하고 털이 복슬복슬하게 난 풀을 뜯어 먹어봐. 잠을 잘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너무 많이 먹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친절히들 가르쳐 주었지만 나는 생각했어.

"다들 그렇게 산다고? 그렇게 사는 게 어떻게 사는 거지? 섬나라 토끼 말을 하느라 내가 얼마나 에너지를 쏟고 있는지 알고 있어? 나는 산에서 살았어, 그것도 호랑이와 함께 말이야. 무서움에 벌벌 떨며 뼈에 붙은 날고기 조각을 먹어 본 적이 있어서 하는 말이야?"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어. 이들과 잘 지내지 못하면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아무리 힘이 들어도 그들의 눈 밖에 날 만한 말이나 행동은 삼갔어.          

 정말 그랬지. 나는 그들과 동화되려고 무진 애를 썼어. 혹시라도 입에서 피비린내가 날까 봐 날고기 생각은 하지도 않으려 했고, 다른 토끼들이 놀랄까 봐 호랑이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산에서 알던 내 상식은 이곳에서는 웃음거리일 뿐이었어. 상처에 좋은 풀이 있다고 가르쳐 주어도 아무도 믿지 않았지. ‘섬나라에 가면 섬나라 토끼들이 하는 식으로 하라’는 말쯤이야 잘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동화되려 애썼는데, 점점 섬이 싫어졌어. 수컷 토끼는 말할 것도 없었고, 내가 낳은 새끼조차……. 숨 막히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어. 다 버리고 떠나고만 싶었지. 하지만 돌아갈 곳이라고는 호랑이 굴 밖에는 없었고, 애써 도망쳐 나온 그곳으로 돌아가기에는 자존심도 상했어.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서 큰잠자리 배에 올라탈 자신이 없어서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혔어.     

 먹지도 자지도 못 하는 나를 본 장로 토끼가 말했어.

“그렇게 먹지 못하면 곧 죽게 될 거야. 저기 호수 건너에는 다른 토끼들이 가지 않는 조용한 풀밭이 있어. 네가 지금 먹고 있는 약초는 위장을 상하게 할 수도 있으니 이제 그 약초는 그만 먹고 조용한 호숫가에서 한동안 쉬어보도록 해. 수컷 토끼에게 자세한 장소를 알려줄 테니 내일 데리고 와.”

나는 대답했어.

“수컷 토끼는 공동체 일을 하느라 밤낮 없이 바빠서 같이 올 수 없을 거예요.”

평소에는 온건한 장로 토끼가 격하게 말했지.

“바쁘고 말고가 어디 있어. 지금 네가 다 죽어가는데. 꼭 데리고 와.”


 날이 갈수록 내가 야위어 가는 것을, 밤마다 잠들지 못하고 눈물만 흘려대는 것을, 다른 토끼들에게 하소연을 하며 방법을 모색하는 것을 수컷 토끼는 정말 몰랐을까? 영리하고 배려 깊은 수컷 토끼는 정말 몰랐던 걸까? 다음날 수컷 토끼와 함께 장로 토끼가 가르쳐 준 호숫가로 갔어.  

 우리는 호숫가에서 깜짝 놀랐어. 조용한 휴양지라던 호숫가에는 이상한, 정말 이상한 토끼들로 북적거렸어. 네 발로 엉금엉금 기기만 하는 토끼, 뒷걸음질하는 토끼, 눈을 내리깔고만 있는 토끼, 쉬지 않고 두 발을 떨고 있는 토끼, 계속해서 뾰뾰뾰뾰라고 말하는 토끼들이 있었어. 나도 모르게 또 눈물이 주르르하고 흘러내렸어. 마음을 다쳐서 아픈 것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들의 모습은 낯설었어. 그리고 나도 그들처럼 마음의 병이 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어.    

 

 피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번쩍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결단을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어. 흐르던 눈물이 쏙 하고 들어갔지. 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어. 그 무섭던,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기억에서 지워버리고만 싶었던 호랑이 가족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호랑이 가족은 으르렁거리기는 했지만, 몸집이 작고 하얀 털을 가진 나를 좋아하고 지켜주었어. 내 기다란 귀부터 발가락까지 전부 다 예쁘다고 말해주던 아빠 호랑이의 목소리가, 짜증을 내면서도 다른 동물들이 할퀴지나 않을까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주던 엄마 호랑이가, 산속의 이곳저곳을 데려다주던 큰오빠 호랑이가, 말이 없고 불쌍한 작은오빠 호랑이가 너무나 그리웠어. 그들은 호랑이 방식이기는 했지만, 아낌없이 관심을 가져주었어. 그때는 그 관심이 무섭고 거추장스럽기만 했는데,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그 관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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