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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샨티 Sep 17. 2022

09. 그리고, 달나라로

09. 그리고 달나라로(그림 Elisha   https://brunch.co.kr/@babyhappy)

 억울했어. 누구 탓도 아니겠지만, 내 삶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어. 토끼인 내가 어쩌다가 호랑이 굴에서 자라게 된 건지, 하필이면 무심하기 이를 데 없는 섬나라 토끼와 인연을 맺은 건지 잘못된 내 선택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며, 내 운명을 저주했지. 연락이 없는 섬나라 가족들도 야속했어. 도토리폰은 어디다 쓰려고 가지고 다니는 건지 비아냥거려 주고 싶었어.     

 갑자기 도토리폰 이야기를 하니까 황당하겠지만, 우리 토끼의 세계에도 엄연히 과학과 문명이 존재해. ‘통신’만 해도 그래. 토끼에게는 ‘도토리폰’이라는 ‘소통기’가 있어. 인간 말로 하자면 스마트폰 같은 ‘이동 통신기’인 셈이지. 건초를 충분히 비축했거나, 좋은 서식지를 확보해 여유가 있는 토끼는 거의 다 도토리폰을 가지고 있어. 토끼풀 줄기로 만든 목걸이에 이 이동 통신기를 걸고 다녀. 어떤 토끼는 귀에 꽂고 쓰기도 해. 가을날 숲길에 떨어져 있는 도토리를 보게 되면 자세히 살펴봐. 어쩌면 도토리폰일지도 몰라. 믿기지 않는다고? 도토리폰은 아주 작아서 인간의 눈에는 그냥 조그만 펜던트 정도로 보일 거야. 순희도 숲에서 나하고 처음 마주쳤을 때 내 도토리폰을 그냥 목걸이로 생각했다고 했잖아.

 도토리폰에는 인간의 스마트폰에 뒤지지 않는 많은 기능이 탑재되어 있어. 전파가 좋은 곳에서는 인간의 ‘뉴스’라는 것도 들을 수 있어. 다른 토끼에게는 지지직 하는 잡음으로 들리겠지만, 인간 말을 아는 나는 그것이 뉴스라는 것을 알아. 동력은 당연히 태양광이지. 우리는 인간과는 달리 자연환경을 보존하려고 무진 노력을 해. 자연이 파괴되면 우리의 삶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니까. 도토리폰 이야기로 말이 옆길로 샜지만, 수컷 토끼나 새끼들이 연락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연락이 가능하다는 말이 하고 싶었어. 하지만 그들은 거의 연락이 없었어. 자기 가족이 아픈 몸으로 혼자서 지내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나 봐. 수컷 토끼가 자주 하던 말이 생각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 난 정 없는 이 말이 정말 싫어.          

 어이없게도 나는 섬나라에서처럼 이 산에서도 풀이 죽어 지냈어. 꿈속에서조차 먹고 싶었던 산속의 토끼풀도, 고소한 이곳의 양배추도, 어쩌다 찾아낸 날고기 조각도 맛있지 않았어. 참 이상한 일이었어. 이것들만 먹으면, 산속을 뛰어다닐 수만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조금도 즐겁지 않았어.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든 즐겁게 보내기로 마음먹고 실없이 즐거운 듯이 “하나 뿅, 두울 뾰뿅, 셋 뿅뿅뿅” 하고 뛰어보기도 했어. “뿅” 하고 말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랐어. 세상에, 그 지겨웠던 섬나라 토끼 말로 숫자로 세고 있는 게 아니겠어. 이제는 하지 않아도 되는 섬나라 말로 혼잣말을 하는 자신이 한심해서 휴우하고 한숨이 새어 나왔어.     

 하루에 한 번은 반드시 산책해야 했지. 토끼는 다리 힘이 약해지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어.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약해지지 않은 이상, 죽으려고 작정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야생의 우리는 우울한 가운데도 뛰어야만 해. 그리고 산책이라도 하지 않으면 무한정의 시간을 감당할 수 없었어. 혼자가 되어 본 적이,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놀라웠어. 내 삶에는 언제나 누군가가 있었지. 호랑이 가족의 잔심부름, 토끼 가족의 먹거리 준비와 토끼 굴 청소가 싫기만 했는데 지금은 식구들을 위해 몸을 움직였던 그때가 그립기만 해.     

 가끔은 산책길을 바꿔 산 아래로 내려가 탐험해 보았어. 탐험 도중에 다람쥐나 고라니, 토끼와 마주치기도 했어. 하지만 서로를 잠시 노려보기만 할 뿐, 친구가 되지는 못했어. 한참을, 산기슭을 따라 내려가 보니 이곳에도 섬나라와 같은, 인간들이 ‘바다’라고 부르는 거대한 푸른 물 공간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어. 바다와 맞닿은 육지를 ‘해변’이라고 부르는 것도 알게 되었지. 도토리폰만 있으면 원하는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세상이니까.     

 해변에는 인간 말로 ‘로켓 발사장’인가 ‘우주 센터’인가 하는 것이 있었어. 몇 년에 한 번씩 빛과 함께 굉장한 폭발음을 내면서 연필 모양의 ‘로켓’이라는 물건을 달나라로 쏘아 올린다는 것을 알았어. ‘로켓 발사장’이니 ‘달나라’니 하는 어려운 말까지 알게 되니까 스스로도 나는 모르는 것은 없는 토끼라는 생각이 들었어.

‘난 정말 멋진 토끼야. 호랑이 말에, 산골 토끼 말, 섬나라 토끼 말, 게다가 인간의 말까지 알고, 큰잠자리를 두 번이나 타 보았어. 세상에 그런 토끼가 어디 있겠어. 그리고 나는 이제 달나라로 가는 법까지 알아. 나는 국제적 지식 토끼야.’

산으로 돌아와서는 거의 하지 않았던 자아도취에 흠뻑 빠져 잠시 잠깐 황홀감을 맛보았어. 하지만 다음 순간 갑자기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번쩍하고 정신이 들었어.     

 모르는 것이라고는 없는 토끼, 국제적 지식 토끼라니!

내 자아도취는 스스로도 병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런 말을 하는 내 자신이 어이가 없었어. 언제나 나는 생각했어. 나는 호랑이 굴에서 자란 불쌍한 토끼라고. 호랑이 가족은 나를 통제하려 했고, 토끼 가족은 애정이 없었고, 섬나라 토끼들은 잘난 나를 몰라보고 무시했다고 말이야. 불쌍한 나에게 세상 모든 토끼는 끝없는 애정을 표현해 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 그들이 나쁘다고만 생각했어.

 그들 눈에는 보였을 거야. 조그만 재능에 도취하여 뻐기고, 불리할 때는 피해의식에 젖어 있는 한심한 토끼가 왜 보이지 않았겠어. 호랑이 앞에서는 벌벌 떨고, 한편으로는 그 호랑이의 뒷배를 이용해 다른 동물에게 뻐기는 비루한 토끼를 누군들 사랑할 수 있었겠어. 밀려드는 부끄러움으로 내 얼굴은 술에 취한 듯 벌겋게 달아올랐고, 방울처럼 조그맣게 매달려 처질 것도 없는 꼬리도 처량하게 엉덩이에 축 달라붙었어. 시든 배춧잎처럼 늘어진 기다란 두 귀를 찢어져라 쥐어뜯으며 산속이 떠나갈 듯이 울부짖었어.

“으으윽, 나는 못난 토끼였어……. 늦었어. 다 끝나버렸어.”      

 소중한 것을 모두 잃어버리고 나서야 내 실체를 알아버린 나는 지금까지 겪은 그 어떤 슬픔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망감을 느꼈어. 슬픔이나 공포, 그리고 자아도취보다도 나쁜 것은 자기 비하의 감정이었어. 무엇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없었어. 눈물도 다 말라버린 것 같았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잠만 잤어. 이렇게 자다 보면 생이 끝나는 순간이 오겠지 하고 그 순간만을 기다리며 끝없이, 끝없이 잠을 잤어.     

 아무도 없는 호랑이굴. 마른 목을 축이려 한밤중에, 옹달샘에 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언제나처럼 물을 마시고 힘없이 굴로 돌아오다 내 발밑에 비친 검은 그림자에 놀라 꼬꾸라질 뻔했어. 달빛에 비친 시커멓고 긴 그림자는 무서운 모습이었어. 토끼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현실의 내 모습 같았어. 내 그림자는 매일 밤 모양을 바꾸었어. 금방이라도 내 등을 덮칠 듯한 유령 같은 모습이었다가, 어느 날은 내 발 앞에 조그맣고 귀여운 토끼가 되어 있기도 했어. 그림자에 점점 익숙해지자 이런 여러 가지의 내 모습이 신기했어. 오늘 밤에는 어떤 모습을 한 내가 있을까 하고 조금 기대하기도 했지.

 절망에 빠져 땅만 보고 걷던 나는 비로소 하늘을 쳐다보았어. 그곳에는 뻐꾸기알 노른자를 꼭 닮은 보름달이 웃고 있었어. 매일 밤 나와 그림자놀이를 해주고 있었지. 우울하고 외로운 토끼를 말없이 달래주고 있었던 거였어. 말라버린 줄 알았던 내 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쏟아져서 얼굴의 털이 흠뻑 젖어버렸어. 세상 누구도 보아주지 않는 못난이 토끼를 저 달은 언제나, 그리고 말없이 지켜봐 주고 있었던 거야.

 보름달 속에는 나와 똑같이 생긴 토끼가 절구를 찧고 있었어. 표정까지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혼자서 절구질하는 토끼가 친근하게 느껴졌어. 세상에 홀로 남겨진 내 모습이 투영된 것 같아서 더 마음이 쓰였던 것일까. 비가 오는 날이나, 달이 모양을 바꿀 때는 토끼가 보이지 않았어. 불안하기도 하고, 하나 남은 희망마저 꺼져버릴 것만 같아서 얼른 비가 그치고 달이 떠오기를, 그리고 다시 달이 차오르기만을 기다렸어. 달나라의 토끼가 내게 보이듯이 토끼에게도 내가 보이겠지? “이방토끼야, 안녕.”하고 보름달 속의 토끼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어.     

 보름달 토끼와 만나고부터 조그마한 희망이 생겼어. 중단했던 산책도 다시 시작했지. 그리고 누군가와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어. 내가 살아온 이야기, 말 없는 보름달 속 토끼 이야기, 그리고 난 지금 몹시 외롭다는 이야기……. 산책길에서 만난 토끼와 몇몇 인간들에게 “안녕, 묘옹” 하고 말을 걸어 보기도 했지. 오랜만에 하는 엉성한 내 산골 토끼 말에 그들은 “뿃”하고 무시하고 지나쳤어. 덩치가 큰 수컷 인간은 벌레라도 보는 듯이 ‘훠이’ 하며 나뭇가지로 내쫓거나, 또 다른 인간은 나를 잡아가려고 했어. 어떤 암컷 인간은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기절해 버려 나를 당황하게 하기도 했지. 난 또 생각했어. 그 누구도 내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그때 순희를 만났어. 난 첫눈에 순희를 알아보았어. 이 암컷 인간이라면 내 말을 들어줄 거라고. 하지만 몇 번이나 실패했기에 나도 신중해졌어.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순희에게 다가갔어. 순희 역시 조심스럽게 나에게 다가와 준다는 것을 느꼈지. 순희가 가져다주는 양배추와 당근은 정말 맛있었어. 따스한 손으로 순희가 내 이마를 쓰다듬어 주면 난 금방이라도 잠이 들어 버릴 것처럼 기분이 좋았어.

 순희에게 말을 걸어 보기로 결심했어. 처음부터 인간 말을 하는 건 참기로 했지. 그때 그 암컷 인간처럼 기절이라도 하면 곤란했으니까. 처음에는 “묘오오” 하고 산골 토끼 말로 말을 걸었어. 순희 역시 그때 그 암컷 인간처럼 놀라는 것 같았어. 하지만 순희는 내가 말을 계속할 수 있도록 참고 기다려 주었어. 참 좋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때부터 우리는 친구가 되었지.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어. 순희와 나는 인간과 토끼라는 종이 전혀 다른 생명체지만, 같은 마음결을 가졌다는 생각이 들었어. 우리는 들꽃이 피는 것을, 나무 둥치 아래 누워서 쉬는 것을, 말없이 개울물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어. 새소리를, 물 흐르는 소리를, ‘똑’하고 은행잎이 떨어지는 소리에 환호했지. 순희는 샌드위치를, 나는 양배추를 뜯어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시간이 정말 좋았어.

 신이 났어. 나는 이제 산으로 돌아왔을 때의 우울해하던 토끼가 아니었어. 어떤 이야기를 해도 공감해 주는 순희가 있고, 언제나 나를 비춰주는 보름달이, 그리고 달 속의 토끼가 있으니까. “순희야. 우울이란 게 뭐지?” 하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행복했어. 그 옛날 수컷 토끼와 만났을 때 못지않게 행복했어. 하지만 순희야. 이 행복한 순간에도 웬일인지 보름달 속의 토끼가 궁금하고 마음이 쓰였어. 불행하던 나를 비춰주던 보름달 속의 나를 닮은 토끼가, 지금도 혼자서 절구질하는 모습이 왠지 안타까웠어.     

 나는 가 보고 싶어. 저 먼 곳에서 말없이 홀로 절구질을 하는 달나라 토끼를 만나보고 싶어. 그곳에서 나도 달나라 토끼와 절구질을 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혼자 있는 시간이 외롭지 않냐고, 매일 하는 절구질이 싫증 나지 않냐고. 외롭고 슬픈 이에게 밝은 달빛을 비춰주는 기분은 어떤 거냐고. 어쩌면 나는 자신의 외로움도 해결하지 못하지만, 나보다 더 외로울지도 모를 달나라 토끼에게 위로를 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 나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어.

 나는 살면서 몇 번의 큰 선택을 한 것 같아. 호랑이 굴을 나올 때는 내가 가진 모든 용기를 냈었고, 섬나라를 떠나올 때 역시 그랬어. 내가 만든 가족을 내 손으로 파괴하는 일은 용기 이상의 에너지가 필요했지. 지금이 세 번째 선택을 할 시간이라고 생각해. 달나라라는 미지의 세계는 두려워. 하지만 용기를 내보고 싶어.

 순희가 말했지. 내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고. 하지만 난 두려웠어. 내 이야기를 세상 사람들이 안다는 것이. 그리고 호랑이 가족이나 토끼 가족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공개한다는 것이 그들에게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아서 꺼려졌어. 하지만 순희 말이 맞는 것 같아. 세상에는 나와 같은 이방인이 무수히 많고, 그들 또한 세상의 이질감에 질려 고통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순희야, 용기를 내볼게. 내 이야기를 글로 써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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