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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샨티 Sep 17. 2022

08. 다시 산으로

08. 다시 산으로(그림 Elisha   https://brunch.co.kr/@babyhappy)

 그래, 돌아가는 거야. 새끼 토끼들도 이제 자기 일은 스스로 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어. 엄마가 없어도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억지로 생각했지. 수컷 토끼에게 큰잠자리 타는 곳까지만 같이 가주면 혼자서 산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어. 수컷 토끼는 놀라는 가운데도 예상한 듯한, 체념한 듯한 표정이었어.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수컷 토끼지만, 자신만을 의지하고 섬나라로 오게 된 내가 호숫가 토끼들처럼 된다는 게 충격적이었을 거야. 자신으로서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했고, 공동체 역할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고 미안한 마음 한편으로 자기 합리화를 하는 수컷 토끼의 마음이 보였어. 그리고 산으로 돌아가겠다는 내 말에 다행스러워하는 마음도. 말은 안 했지만 내 눈물과 짜증을 견뎌내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니 말이지. 원망과 이해의 마음이 번갈아들었지만, 확실한 것은 이대로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어.     

 마음을 정하고 나니 하루도 더 섬나라에 머물기 싫어졌어. 우리는 다음날 당장 큰잠자리 광장으로 향했어. 젊고 행복에 겨웠던 그때는 먼 것도 몰랐는데, 나이가 들어버린 우리는 뛰다가 쉬고, 뛰다가 쉬기를 반복하며 큰잠자리 광장에 도착했어. 큰 소리를 내며 날갯짓을 준비하는 큰잠자리를 향해 뛰었어. 무정하게 아빠 호랑이와 이별을 했던 그때처럼, 이번에도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깡충하고 큰잠자리의 배에 올라탔지. 수컷 토끼가 급하게 말했어.

“이방토끼야. 산에서 잘 지내고 있어. 아직은 새끼를 먹여 살려야 하고, 공동체의 일도 해야 해서 지금은 같이 갈 수 없어. 공동체에서 주어진 역할이 끝나면 반드시 호랑이 굴로 찾아갈게. 그때는 그곳에서 같이 살기로 하자.”

수컷 토끼는 큰 소리로 외쳤지만, 우리는 둘 다 그 말이 얼마나 허망한 건지 알고 있었다고 생각해. 수컷 토끼의 외침은 큰잠자리의 날갯짓 소리에 묻혀갔어.          

 먼 길을 뛰어오느라 뒷다리에 경련이 났고, 무사히 큰잠자리에 올라탄 것에 안심한 탓이었을까, 삭신이 노곤해져서 잠시 토끼잠을 잤어. 꽤 잤다고 생각했는데도 큰잠자리는 아직도 날고 있었어. 수컷 토끼와 함께했을 때는 순식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혼자서 하는 하늘 여행은 길고 두려웠어. 그래도 잠시라도 자고 나니 몸과 마음이 개운했고, 나는 내가 의외로 침착한 것이 놀라웠어.     

 큰잠자리는 옛날 수컷 토끼와 함께 탔던 광장에 도착한 듯했어. 전에 수컷 토끼에게서 배운 대로 인간들의 움직임이 멀어지고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광장을 빠져나와 호랑이 굴로 향했어. 작은 오솔길이 큰길로 바뀌기도 했고, 큰오빠 호랑이와 다니던 샛길이 없어져서 한참을 빙글빙글 돌아가야 하기도 했지만, 내 감각은 기억하고 있었어. 개울가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서 개울이 시작되는 곳, 무성한 덩굴로 가려진 큰 바위 밑에 있는 우리의 굴. 뒷다리에 힘이 다 빠질 때쯤에야 옛날 내가 살던 호랑이 굴이 보였어. 아빠 호랑이는 여전히 포효하고 있겠지, 엄마 호랑이는 맛있는 사슴을 사냥해 왔을까, 큰오빠 호랑이는 섬나라 이야기를 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겠지, 작은오빠 호랑이도 슬며시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거고.     

 모두를 놀라게 해 줄 요량에 조용히 그러나 급하게 뛰어 들어간 호랑이 굴에는……, 아무도 없었어. 굴이 비워진 지 시간이 한참 흐른 건지 온기조차 남아있지 않았어. 실망감에, 다리에 힘이 빠져서 털썩하고 주저앉고 말았어. 아직도 나에게 남은 기대가 있었다는 사실에 아연했어.

 점차 어둠에 눈이 익으니, 굴의 여기저기에 뽀얀 먼지와 거미줄 사이로 우리가 함께 했던 흔적들이 눈에 들어왔어. 벽에 팬 호랑이 발톱 자국과 남아 있는 동물의 뼈가 그리움으로 다가왔어. 먼지 묻은 사슴 뼈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어. 그리운 아빠 호랑이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어. 날고기에 익숙지 않은 내가 배탈에 시달려 아파할 때면 밤새 등에 태워 달래 주었던 아빠 호랑이. 사냥하거나 험한 산길을 뛰느라 항상 뒷다리가 아프다고 하소연했던 아빠 호랑이. 주물러 달라며 뒷다리를 내미는 아빠 호랑이에게 더 정성껏 다리를 주물러 주지 않았던 것이 생각나서 그리움과 함께 후회의 눈물이 쏟아졌어.    

 

 하지만 마냥 그리워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지. 풀만 뜯어 먹고 지내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많았어. 나는 다짐했어.     

‘이제 나는 정말 혼자야.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 줄 수 없어. 가족이나 친구의 태도 하나에 내 행복이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되지. 내 행복은 내가 만드는 거야. 오롯이 나 혼자서.’

어느 때보다 마음을 굳게 먹었어. 하지만 젊은 날의 대부분을 섬나라에서 보낸 나에게는 이제 이곳 산속이 또 하나의 외국 같았어. ‘실컷 날고기를 먹어 보리라, 새 토끼 친구를 사귀어 보리라, 그리웠던 계곡을 매일매일 산책하리라’ 하고 마음을 먹었지만, 호랑이 굴에서 혼자 지내는 것은 쉽지 않았어. 너무나 외로웠어. 잠이 덜 깨어 정신이 몽롱할 때는 ‘여기가 어디지? 산속이야? 섬나라야?’ 하며 지금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를 때도 있었어.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그 기분을 순희는 알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먹먹한 기분이었어. 아침에 일어나도 옆에는 아무도 없었고, 어둠이 내려앉아도 돌아올 그 누구도 없었어. 굴에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도 토끼 가족이 돌아온 줄 알고 나도 모르게 깡충 하고 마중을 나간 적도 여러 번이었어.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이제는 또 섬나라 토끼 가족을 생각하고 있었어. 언제나 없는 것을, 잃어버린 것을 그리워하는 멍청이……. 하지만 용기를 내어야 했지. 옹달샘 가나 토끼가 있을 만한 풀밭 주위를 살펴보았어. 가끔은 토끼와 마주치기도 했어. 하지만 마음이 끌리지 않았어. 섬나라 토끼들은 재미는 없었지만 조용했는데, 이곳 토끼들은 너무 시끄러워. 게다가 입만 열면 서식지를 넓히겠다, 건초를 얼마나 모아두었냐, 어느 토끼 학교를 나왔냐 같은 속물 같은 말만 해. 그리고 이들은 나의 마음을 후벼파는 말들을 거리낌 없이 했어.

“이방토끼야. 너 왜 혼자지? 결혼은 해 봤어? 새끼는 있어? 앞으로 뭐 하고 살 거야?”하고 말이야. 나는 이들의 말이 정말 식상했어. 이들과 함께 어느 골짜기가 미래가치가 있는 서식지인지, 어느 농장의 양배추가 유기농인지 하고 떠드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 보였어. 돌아온 이곳 산속에서도 섬나라에서처럼 ‘우리’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캄캄한 예감이 들었어.


08. 다시 산으로(그림 Elisha   https://brunch.co.kr/@baby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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