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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샨티 Sep 16. 2022

06. 토끼 가족

06. 토끼 가족(그림 Elisha   https://brunch.co.kr/@babyhappy)

 영원할 것 같았던 호랑이 굴에서의 불안한 나날에도 끝은 있었고, 영원히 행복할 것 같았던 섬나라 생활도 무언가 달라지고 있었어. 행복해지려고 호랑이 굴을 나왔는데 시간이 갈수록 외롭다는 생각이, 그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어. 나는 호랑이 가족에게서 배운 대로 한껏 수컷 토끼를 사랑했고, 새끼를 용감하게 키우려고 애썼어. 섬나라 토끼와 동화되려고 무진 노력했는데 말이지. 호랑이와도 살아냈는데 같은 종족인 토끼와의 생활은 아무 문제가 없을 거로 생각했어. 하지만 섬나라 토끼와는 ‘호랑이와 토끼의 공생’ 이상의 문화적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 수컷 토끼나 섬나라 토끼들은 입만 열면 이렇게 말했어.

“다른 토끼에게 절대 폐를 끼쳐서는 안 돼.” 수컷 토끼는 내게서 양배추 잎을 건네받을 때면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지. 실수로 내 짧은 꼬리에 살짝 닿기만 해도 “정말 미안해”라고 이야기했어. 하지만 나는 그게 그렇게 고마울 일이고, 그렇게나 미안해할 일인가 하고 의아했어. 나는 고마울 때나 미안할 때 쑥스러워서라도 그런 말을 하지 못할 때가 많았어. 서로에게 도움을 받거나 폐를 끼치는 것은 가족끼리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나를 그들은 이상해했어. 새끼들마저도

“엄마는 왜 고맙다거나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아?” 하고 비난하듯이 말했어.      

 식사할 때도 섬나라 토끼들은 각자의 장소에서 말없이 양배추나 풀을 먹기만 해. 나는 내가 가진 풀이 모자라면 옆 토끼에게 나눠달라고 했고, 다른 토끼가 부족해할 때는 내가 가진 것을 나눠줬어. 그들은 이런 나를 식욕도 조절 못 하는, 자기 관리가 안 되는 얼렁뚱땅 토끼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 가족인데, 공동체 구성원인데 서로서로 나누는 것이 이상한 일인가 싶었어. 차츰 그들이 야박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새끼 교육도 내가 알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어. 호랑이 엄마한테서 자란 내게 ‘엄마’라는 존재는 강하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자식 교육에 열정을 쏟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나는 내 새끼를 천적으로부터 스스로 몸을 지킬 수 있는 강하고 지혜롭게 키우려고 애썼어. 하지만 이곳의 엄마 토끼는 새끼에게 정말 상냥했어. 호랑이 엄마만 보아온 나는 온화한 이곳 엄마들이 부럽고 존경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새끼를 저렇게 약하게 키워도 되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어. 하지만 천적이 없는 이곳에서는 호랑이 식의 교육은 아무 쓸모가 없었지. 새끼들은 되려 호랑이 엄마처럼 무섭게 교육하는 나에게 반발했어.

“그래그래, 엄마는 참 똑똑해.”라며 나보다 유창한 섬나라 토끼 말로 빈정거렸어. 새끼들은 커 가면서 엄마와 있는 것보다 친구 토끼들과 노는 것이 더 즐거운 듯이 보였어. 눈만 뜨면 엄마를 찾았었는데, 이제는 풀을 한 움큼 입에 넣고는 ‘뒷다리 운동 학원’이다, ‘귀 쫑긋 세우기’ 학원으로 나다니느라 얼굴 보기도 어렵게 됐어. 우리 토끼에게도 인간의 학교나 학원 같은 교육 시설이 있어. 공격보다는 방어 위주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청력은 무척 중요한 감각이지. 잠을 잘 때조차 느긋하게 귀를 접고 자서는 안 돼. 언제나 귀를 쫑긋 세우고 주변을 살펴야 하기 때문에 귀 쫑긋 세우기는 토끼 세계에서는 필수 교육이었어. 그리고 적을 감지했을 때는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가야 하기 때문에 뒷다리 힘은 목숨 그 자체야. 모든 새끼는 의무적으로  ‘뒷다리 운동’  학원에 다녀야 했어.      

 새끼들은 간혹 굴에 있을 때도 먹이를 먹을 때 말고는 무엇을 하는지 조그만 자기 모퉁이에만 틀어박혀 있었어. 가끔은 아빠 호랑이가 해주었던 것처럼 글루밍을 해주려고 해도 질색을 하며 튀어 나가 버렸어. 정말 이상한 일이었지. 생선을 싫어하는 고양이가 없듯이, 글루밍을 싫어하는 토끼가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거든. 나 자신도 성장과 함께 부모의 손길과 간섭이 싫었다는 생각은 잊어버리고, 새끼들이 엄마를 싫어한다 싶어 점점 슬픈 생각이 들었어.         

 매일 같이 식구들 먹을 풀 뜯기에 여념이 없는 수컷 토끼와의 애정도 옛날 같지 않았지. 신혼이 지났으니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려 했지만, 외롭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어. 공포나 불안 같은 감정에는 익숙했지만, 외롭다는 감정은 아주 낯설었어. 수컷 토끼에게 말해봤어.

“수컷 토끼야. 나 요즘 이상한 기분이야. 외롭고, 전에 살던 산 풍경이 그리워. 그리고 이곳 풀은 물기가 너무 많아. 산에서 먹던 풀은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했는데, 여기는 풀이나 양배추나 할 것 없이 산에서 먹던 그 맛이 아니야. 그리고 나 혼자 있기 싫어.”

평소의 자신감 있고 명랑하던 모습과는 달리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풀 죽은 목소리로 하소연하는 나를 수컷 토끼는 등을 핥아주며 말했어.

“이방토끼야, 너무 슬퍼하지 마. 내일은 조금 멀리 나가서 다른 양배추밭으로 가보자. 거기 양배추는 산에서 먹었던 양배추하고 같은 맛이 날지도 모르잖아.”

 우울한 가운데도 수컷 토끼의 다정한 말에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어.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이 섬 어느 풀밭의 토끼풀도, 양배추도 산에서 먹었던 그 맛이 아니었지. 매일 밤 호랑이 굴 근처의 풀밭으로 가는 꿈을 꾸었어. 맛있는 토끼풀을 발견하고는 신기하고 반가워서 꿈속에서도 꿈 같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꿈속에서조차 그 맛있어 보이는 토끼풀을 입에 넣어보지는 못했어. 꿈을 깨고 난 아침에는 허망함에 식욕도 기력도 다 사라졌어. 가끔은 호랑이 굴에서 먹었던 날고기까지 생각났어.     

 엄마 호랑이는 내가 토끼라는 사실을 잊은 건지, 아니면 아예 습성을 바꿔 진짜 호랑이가 되기를 원했던 건지 어떻게든 날고기를 먹이려고 애썼어. 피비린내에 구역질이 났던 날고기였는데 그게 먹고 싶어지다니 참 이상했어. 하지만 섬나라에서는 누구에게도 날고기가 먹고 싶다고 말할 수 없었어. 내 입에 묻은 피를 보면 새끼들이 놀라서 도망칠 것 같아서 날고기의 ‘ㄴ’ 자도 꺼내지 못하고 지냈어. 견디다 못해 수컷 토끼에게 내 성장의 비밀을 이야기하고, 토끼답지 않은 내 행동에 대해 이해를 구했지. 수컷 토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촌 토끼가 아니었어. 수컷 토끼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어.”라고 다정하게 말해 주었어. 하지만 젊은 수컷 토끼는 공동체에서 해야 하는 역할이 커지고, 점점 더 바빠졌어. 유일하게 나를 이해해 주는 수컷 토끼와 있는 시간은 줄어들고, 날이 갈수록 두고 온 고향이 그리워 내 빨간 두 눈에는 이슬이 고이기 시작했어.

  이런 내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는 수컷 토끼가 야속했어.

“나하고 같이 좀 있어 줘. 나 요즘 날고기가 먹고 싶고 많이 외로워.”

성실하고 인내심 많은 수컷 토끼도 반복되는 내 투정에 더 이상 반응하지 않게 되었지. 무뚝뚝한 목소리로 “나 요즘 바쁜 거 알잖아. 새끼들이 풀을 보통 많이 먹는 게 아니야. 더 많은 풀과 양배추를 구해와야 하고, 밤을 새워 공동체 망을 보는 것도 힘들어. 날고기가 먹고 싶으면 스스로 구해서 먹도록 해. 난 네가 날고기를 먹는 것을 막고 싶지는 않아.”

 서운했어. 퉁명스럽게 말하는 수컷 토끼는 옛날 다정하던 그 토끼가 아닌 것 같았어. 나는 점점 말이 없어졌고, 수컷 토끼는 아예 말을 하지 않게 되었어. 수컷 토끼가 돌아올 시간을 기다렸다가 그날 있었던 사소한 이야기라고 나누고 싶었지만, 수컷 토끼는 “난 원래 말주변이 없잖아. 그리고 특별한 일도 없었어.” 하며 무심한 표정으로 풀을 먹기만 했어. 그러고는 곧바로 잠이 들었고, 다음날은 또 일찍 일어나 공동체에서 주어진 일을 하러 나갔어.          

 행복에 겨워 지나치게 흥분했던 것일까. 재롱을 떨고 까불다가 구름 위에서 땅으로 곤두박질치며 떨어지는 기분이었어. 하지만 나는 호랑이 굴에서 살아 나온 토끼야. 이대로 못난이 토끼로 있을 수는 없어. 아내로서 엄마로서 더욱더 성숙해져야 한다고 나를 다그쳤어.

‘조금만 더 노력하자. 아무도 나쁘지 않아. 수컷 토끼는 자기 역할에 충실할 뿐이야. 새끼에게도 언제나 다정한 엄마가 되어야지. 사랑을 받고 싶으면 사랑을 받을 만한 토끼가 되어야 해.’ 나는 조그만 앞발을 불끈 쥐며 다짐했어.  

  

 식사 시간이었어. 가족에게 토끼풀과 함께 지난밤에 주워 온 날고기 조각을 별미라도 되는 듯이 내밀며 말했어.

“얘들아, 이것도 먹어봐. 맛있어. 묘흥.”

계속되는 외로움과 자기부정, 그리운 호랑이 가족 생각에 나도 모르게 참고 있었던 호랑이 말이 불쑥 튀어나와 버렸어. 게다가 피 묻은 날고기까지 내밀면서. 갑작스러운 일에 나도 놀랐지만, 가족 토끼들은 까무러쳐 버렸어. 내 비밀을 알고 있는 수컷 토끼까지도 빨간 눈알이 빠질 듯이 놀라는 눈치였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것도 알지. 묘흥하며 날고기를 먹으라고 하는 토끼는 처음 봤을 테니까. 게다가 내 아내, 내 엄마가 호랑이 짓을 하니 얼마나 놀라웠겠어.     

 수컷 토끼는 원래가 유순한 토끼였어. 튀어나온 눈동자를 서둘러 제자리에 돌려 넣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지만, 날고기 조각을 같이 먹어 주지는 않았어. 보통 토끼와는 다른 내 행동에 대해 그러지 말라고 강요는 하지 않았지만, 공감해 주지는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의 굴 안에서만이라도 아빠 토끼가 나와 함께 날고기를 먹어주었더라면, 호랑이 말을 조금이라도 익혀서 가끔은 호랑이 말로 대화를 했더라면, 철없는 새끼들이 반항할 때 내 편을 들어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원망과 함께 그의 무능함에 실망감이 몰려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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