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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샨티 Sep 15. 2022

04. 만남

04. 만남(그림 Elisha   https://brunch.co.kr/@babyhappy)

 난 미련 없이 호랑이 굴을 나왔어. 세상 밖이 무섭기는 했지만, 이제 아빠 호랑이의 포효 소리, 엄마 호랑이의 질책을 듣지 않아도 됐어. 큰오빠 호랑이의 감시하는 눈빛도, 작은오빠 호랑이의 불만 어린 얼굴도 나와 상관없게 됐어.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었어.

“아~, 행복해. 나는 살아서 호랑이 굴은 빠져나온 첫 번째 토끼일 거야. 이제부터 나에게는 좋은 일만 기다리고 있을 게 틀림없어. 꼭 행복해져야 해.”

 심호흡을 한번 하고서는 굴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열심히 걸어갔어.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호랑이처럼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는 내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어. 난 토끼인데 말이야. 얼른 마음을 가다듬고 토끼답게 걷기 시작했어, 아니 깡충하고 뛰었어. 아무리 점잖은 자리에서라도 토끼는 걷는 게 아니라 폴짝폴짝 뛰잖아. 이제 나는 토끼 본능에 충실하게 살 거야. 마치 태어날 때부터 토끼들 무리 속에서 살았던 것처럼, 어느 토끼보다도 토끼답게 살기로 결심했어.   ‘깡충깡충’, 정신없이 뛰어다녔어. 산속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넓은 풀밭을 만나자 내 토끼 본능이 폭발해 버렸어. 한참을 뛰어다니다 보니 저 멀리서 토끼풀을 뜯어 먹는 수컷으로 보이는 하얀 토끼가 눈에 들어왔어.

 “앗, 토끼다.” 호랑이 굴을 나와 처음으로 토끼를 만나자, 마음이 급해진 나는 나도 모르게 또 어슬렁거리며 바삐 걸었어. 버릇처럼 호랑이 짓을 하는 못난 자신을 잠시 책망하며 토끼답게 깡충깡충 뛰어서 다가갔어. 가까이서 보는 이 수컷 토끼라니, 내가 본 토끼 중에서 제일 사랑스럽고 멋졌어. 부드럽고 새하얀 앙고라 털, 나와 꼭 같이 생긴 길고 쫑긋한 두 뒤, 동그랗고 빨간 눈동자, 툭 튀어나온 앞니로 아래턱을 좌우로 흔들며 오물오물 풀을 뜯어 먹는 사랑스러운 모습이라니. 검고 거센 호랑이 가죽만 보아오던 나는 정신이 아득할 정도였어. 한눈에 반했던 거지. 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걸었어.

“얘, 너 정말 멋지구나. 나 너한테 한눈에 반했어.”     

 엄마 호랑이에게 혼이 나면서도 숨어서 토끼 말을 배워 둔 게 이렇게 요긴하게 쓰이다니, 난 정말 대견해. 버릇처럼 잠시 잠깐 또 자아도취에 빠지기는 했지만, 얼른 정신을 가다듬고 새로 만난 토끼에게 집중했지. 산토끼치고는 비정상적으로 덩치가 작은 나보다는 한 뼘 정도 커 보이고 눈부시게 하얀 털을 가진 이 수컷 토끼는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어. 세상 물정을 모르기는 이 수컷 토끼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 처음 보는 암컷의 페로몬 냄새와 애교 섞인 혀 짧은 목소리로 귀엽게 구애하는 내게 호로록하고 한방에 넘어오고 말았어. 호랑이 굴에서 살아서 나온 것만으로도 기적 같은 일인데, 이렇게 멋진 수컷 토끼까지 만나다니. 지금 당장 여우나 호랑이에게 잡아먹힌다고 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어.   

   

 젊은 우리는 매일 같이 사랑을 나눴어. 하루는 토끼풀, 다음날은 당근, 또 다음날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양배추를 마음껏 뜯어 먹었어. 당근이나 양배추밭에는 개나 고양이가 있을지도 모르니 수컷 토끼와 교대로 망을 보며 맛있게 먹었어. 수컷 토끼는 서투른 토끼 말을 하는 나를 무척이나 귀엽다는 듯이 바라봐 주었지.

“이방토끼야, 너처럼 토끼 말을 예쁘게 하는 토끼는 본 적이 없어.”라며 칭찬해 주었을 때는 황홀했어. 꿈속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지. 길 가는 누구라도 붙잡고 “나 지금 너무 행복해요.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다니요.”라고 자랑하고 싶었어. ‘구름 위에 떠 있는 기분’이라는 말이 있지만, 딱 이럴 때 쓰는 말이었어. 부드럽고 몽실몽실한 구름 방석 위에 앉아서 하늘을 나는 편안하고도 흥분되는 아찔한 기분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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