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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샨티 Oct 05. 2023

02. 호랑이가 될 토끼

02. 호랑이가 될 토끼(그림 Elisha   https://brunch.co.kr/@babyhappy)

 나는 이방토끼라고 해. 귀가 길고 눈알이 빨간 나를 보고 인간은 ‘토끼’라고 하지. 토끼라고 한마디로 정리들 하지만, 나는 산에서 사는 산토끼란다. 산토끼치고는 유달리 작기는 하지만, 섬세한 감성과 호기심, 특유의 기지와 성급함은 여느 토끼와 크게 다르지 않아. 모든 토끼가 그렇겠지만, 나는 경계심이 몹시 강하고 겁이 많아. 게다가 나는 자기애가 몹시 강해서 누구도 불러주지 않을 이름을 나에게 붙였어. 나는 그냥 ‘토끼’가 아니라 다른 토끼들과는 구별되는 하나뿐인 ‘나’이고 싶었거든. 큰 소리로 ‘토끼야’ 하고 불러도 난 뒤돌아보지 않아. 아무리 작은 소리로라도 ‘이방토끼야’ 하고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바로 달려가 내 짧은 앞발로 꼭 안아줄 거야.     

 이름을 짓는 일은 정말 어려웠지만 이것만큼은 뒤로 미룰 수도, 아무렇게나 정하고 싶지도 않았어. 토끼과 동물은 성질이 급해. 나는 내가 가진 신중함이란 신중함은 총동원해서 마음에 꼭 와닿는 이름을 생각해 봤어. 자화자찬 같지만, 나는 언어에 천부적인 재능과 감각이 있다고 생각해. 산토끼 말 외에도 다양한 종족의 언어를 조금씩은 알고 있어. 그런 내 이름은 어느 종족의 생명체도 쉽게 발음할 수 있어야 하고, 울림이 맑아야 하고, 향기가 느껴져야 했어. 그리고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나를 잘 나타낼 수 있어야 했어.

토아, 토심이, 토마토끼…….

며칠을 고민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방인’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지. 난 이 이름에 무척 끌렸어. 쉬운 발음이나 향기로움도 중요했지만, 나를 설명하기에 이것보다 더 좋은 이름은 없을 것 같았어. 이방인, 나는 토끼니까 ‘이방토끼’인 거지. ‘이방’이라는 단어는 쓸쓸한 느낌은 있었지만, 나를 잘 나타내는 듯해서 마음에 쏙 들었어.


 어린 내가 어쩌다가 혼자서 산속을 헤매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날은 운이 나쁘게 호랑이에게 붙잡히고 말았어. 영락없이 죽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이 호랑이는 그 자리에서 날 잡아먹지 않고, 내 목덜미를 물고 호랑이 굴로 향했어. 덩치가 크고 무섭게 포효하는 호랑이와 마주치자, 잡아먹히기도 전에 기절하고 말았어. 원래 토끼는 경망스럽고 겁이 많잖아.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살짝 눈을 떠보니 아직 내가 숨을 쉬고 있는 게 느껴졌어. 가만히 앞발과 뒷발을 들여다보니 내 몸은 그대로 남아있었고, 아프지도 않았어. 살아있다는 것이 놀라웠지만, 무시무시한 호랑이와 함께 있다는 것이 끔찍했어. 살며시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아버렸어. 기절한 척하고 잠시 상황을 살펴보기로 마음먹은 거지.     

 굴에는 나를 물고 온 호랑이 한 마리뿐이 아니었어. 그곳에는 커다란 호랑이가 3마리나 더 있었지. 그들은 배가 부른지 굴의 여기저기서 널브러져 있었어. 까무러칠 것 같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번 실눈을 뜨고 찬찬히 둘러봤어.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말이 떠올랐어.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이 순간에 딱 맞는 말을 찾아낸 자신이 대견했어. 그리고 정신을 바짝 차리자고 나를 격려했지.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혼이 나갈 것 같았어. ‘지금은 배가 부르니까 잡아먹지 않겠지만, 배가 고파지면 바로 잡아먹고 말 거야.’하고 생각하니 아찔했어.


 호랑이들은 사냥이 능한 건지 언제나 배가 불러 보였어. 덕분에 하루하루를 연명할 수 있었지. 심지어 무리의 대장 격으로 보이는 호랑이는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거든. 나중에 알고 보니 호랑이 굴로 나를 물고 온 것도 이 호랑이였어. 기분이 좋을 때는 크고 까칠까칠한 혀로 핥아주기까지 했어. 처음에 호랑이가 그 큰 입을 내 얼굴에 들이밀었을 때는 ‘이제야말로 죽는구나!’ 하고 체념하며 눈을 꼭 감았더랬어. 눈을 감고 반은 기절한 상태로 있으려니 따뜻하고 촉촉한 혀로 털을 빗겨주는 기분 좋은 느낌이 들지 뭐야. 나는 털을 깨끗하게 빗어 몸단장하는 글루밍을 무척 좋아해. 호랑이의 글루밍 실력은 훌륭했어.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섬세하고 부드럽게 털을 핥아주는 이 호랑이가 조금 마음에 들었어.     

 호랑이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 만큼만 살짝 실눈을 뜨고 호랑이의 표정을 살펴봤지. 산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는 커다랗고 둥근 눈알을 아래위로 굴리며 위협하는 표정이었는데, 호기심을 가득 담아 나를 쳐다보는 표정이라니……. 흐뭇하다는 듯이 눈꼬리를 팔자로 내리고 꼬리도 느긋하게 처져 있었어. 지금 당장은 잡아먹지 않을 것 같은 확신이 들자, 휴우하고 한숨을 내쉬었지. 너무 놀랐다가 갑자기 안심한 탓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기분 좋게 잠이 들었어. 얼마나 잤을까. 원래 토끼는 ‘토끼잠’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얕은 잠을 자는 습성이 있잖아. 먹이 사슬의 최하위에 속하니만큼 침을 질질 흘리고 깊은 잠을 자다가는 여우나 호랑이의 배 속에 있게 될 거잖아. 그런데 그날은 오랜만에 두 다리를 쭉 뻗고 한잠 늘어지게 잤어. 두려움을 내려놓고 단잠을 자고 나서 생각하니 이 호랑이는 나를 좋아하는 게 분명했어.

“휴우, 이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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