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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샨티 Oct 05. 2023

03. 호랑이 가족

03. 호랑이 가족(그림 Elisha   https://brunch.co.kr/@babyhappy)

 지금 당장은 살아 있지만, 먹잇감이 떨어지면 언제라도 잡아먹히고 말 것 같은 불안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어. 비루하다고는 생각했지만, 호랑이들의 비위를 맞추려 온갖 잡다한 심부름을 했지. 네 마리의 호랑이는 모두 난폭했지만, 각각 다른 ‘개성’이라는 것이 있어 보였어. 나를 물고 온 호랑이는 이 가족의 아빠였어. 자연스럽게 나도 아빠라고 불렀어. 하지만 나는, 호랑이 말의 발성에 한계가 있었어. 단어를 아무리 많이 알아도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았거든. ‘어흥, 어흐흥’ 하고 포효하고 싶어도 ‘묘흥, 묘으응’처럼 토끼 말도 호랑이 말도 아닌 묘한 말이 되어버렸지. 아빠란 단어도 마찬가지야. ‘아빠’라고 발음하는데도 ‘묘빠’로 들리는 모양이었어. 가족은, 처음에는 혹독하게 발음 연습을 시켰지만, 언제까지나 고쳐지지 않자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어. 아빠 호랑이는 오히려 ‘묘빠’라고 불리는 걸 좋아하기까지 했어.     

 아빠 호랑이는 포효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어. 자기가 이 굴의 대장이라는 것을 과시라도 하듯이 별일 아닌 일에도 포효했어. 다른 호랑이도 덩치가 제일 크고 포효 소리가 우렁찬 아빠 호랑이를 그럭저럭 서열 1위로 인정하는 눈치였지만, 아빠 호랑이는 포효 소리나 덩치에 비해 사냥 실력이 그닥 뛰어나지는 않았어. 굴의 최고 사냥꾼은 엄마라고 불리는 암컷 호랑이였어. 그래서인지 아빠 호랑이는 아내 호랑이에게 열등감이 있어 보였어. 무뚝뚝한 아들 호랑이와는 위협하듯 으르렁거리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소통도 하지 않았지. 현재의 삶에 만족 못 하는 그의 마음이 어린 내 눈에도 보였어.

 큰 덩치와는 달리 다정다감한 아빠 호랑이는 삶의 허무감을 느끼던 그때 나를 사냥했던 거였어. 그 자리에서 나를 잡아먹지 않고 굴까지 물고 온 것은 가족에게 사냥 실력을 뻐기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해. 아빠 호랑이는 가족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나를 내려놓았어. 하지만 이미 배가 부른 호랑이 가족은 생쥐만큼이나 작은 나에게 아무런 식욕도 관심도 없었어. 가족의 시큰둥한 반응에 머쓱해진 아빠 호랑이는 둘 곳 없는 시선을 내게로 향했어. 자기가 생각해도 보잘것없는 사냥감이다 싶었는지 눈길을 돌리려는 순간, 불안한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내 눈과 마주쳤던 거야.


 난 본능적으로 판단했어. 이 굴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서든 아빠 호랑이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고. 아빠 호랑이만이 나를 살려줄 수 있다고. 난 내가 가진 모든 애교와 재롱을 총동원해서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어. 아빠 호랑이가 좋아하는 ‘묘빠’(아빠)라는 말도 “묘빠아”라며 애교를 섞어서 말했어. 그야말로 입 속의 혀처럼 행동했지. 굴에서 내가 가장 신경 써서 했던 일은 아빠 호랑이의 눈길이 닿는 곳을 놓치지 않고 보는 거였어. 아빠 호랑이의 눈길이 닿는 곳에 그가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배우지 않아도 알게 되었던 거지. 나는 아빠 호랑이가 말하지 않아도 원하는 것을 대령할 수 있었어. 그럴 때의 아빠 호랑이의 흡족해하는 표정이라니. 아빠 호랑이는 행복해했고,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나도 덩달아 행복했어. 아빠 호랑이는 배가 부를 때나 고플 때나 언제나 나를 예뻐해 주었어. 억누르고 있던 보호본능과 부성이 조그맣고 연약한 산토끼에게로 향했던 거지.     

 호랑이 가족과 생활하면서 나는 점점 그들에게 익숙해졌고, 그들도 나를 가족으로 받아 주는 눈치였어. 시간이 흐를수록 나도 내가 작은 호랑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 호랑이와는 크기나 털 색깔, 발톱이나 입 모양이 아예 다른, 비교 자체가 말이 안 될 만큼 생김새가 완전히 달랐지만, 아직 어려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비위에 맞지 않아 복통을 일으켰지만, 호랑이와 함께 피 묻은 날고기를 먹었고, 어슬렁어슬렁하며 호랑이처럼 걸었어. 다른 동물을 만나면 ‘어흥’ 하고 위협하려 했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묘응’ 하는 소리에 그들은 나를 비웃었고, 나는 내가 이상했어. 많이 먹고 많이 자라면 내 생김새도 호랑이처럼 변할 거라고 생각했어. 성장과 함께 가죽 색깔이 점차 짙어지며 자연스럽게 검정 무늬가 생길 거라고, 덩치 또한 당연히 커지는 건 의심도 하지 않았어. 아직은 작고 토끼처럼 생겼지만, 어느 날 갑자기 당당한 호랑이가 될 나를 기대했던 거야.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내 털은 흰색인 채였고, 덩치 또한 호랑이의 앞발 하나만큼도 자라지 않았어. 난 그냥 조그만 토끼인 채였어.         


 어느 때부터인가 아빠 호랑이의 애정이 귀찮아졌어. 죽음을 면했다는 절박함이 없어진 탓이었을까? 지나치게 내 행동을 제약하는 아빠 호랑이가 점점 싫어졌어. 굴 밖에서 조금만 돌아다녀도, 토끼 친구를 사귀기만 해도 꼬치꼬치 캐물었어. 넘칠 듯한 사랑과 함께 속박이 따랐던 거야. 나는 풀밭에서 폴짝폴짝하고 토끼들과 뛰어놀고 싶은데, 아빠 호랑이는 내 습성을 이해해 주지 않았어. “새 알 하고 귀여운 토끼는 밖으로 내돌리면 안 된다. 깨지기 십상이고 여우의 먹잇감만 된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어.    

 시간이 갈수록 이상한 것은 아빠 호랑이의 아들 호랑이에 대한 태도였어. 호랑이가 아닌 나에게는 무한한 애정과 관심을 쏟아부으면서 정작 자기 아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엄격했어. ‘백수의 왕’으로 키워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부자지간이기는 해도 수컷끼리의 견제라는 본능 탓이었을까. 아빠 호랑이의 엄격함 탓에 굴에는 항상 긴장감이 감돌았어. 난 이 긴장감이 싫고 무서웠어. 긴장감의 피해자는 언제나 나였으니까. 으르렁거리는 소리만 들리면 얼른 굴의 한 귀퉁이에 있는 바위틈으로 피했어. 다투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긴 귀를 앞발로 접어서 막았어. 새끼 토끼 주제에 그러지들 말라고 말할 처지가 아니었잖아. 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보고도 못 본 척, 있어도 없는 척하고 늘 숨죽이고 살았어.          

 

 엄격하기는 해도 다정한 아빠 호랑이에 비해 엄마 호랑이는 사납기가 왕중왕 감이었어. 사냥도 몹시 잘해서 어흥하고 으르렁거리기만 할 뿐 사냥에 서툰 아빠 호랑이 대신 고라니나 사슴, 두더지를 잡아 왔어. 가족은 엄마 호랑이가 사냥해 온 사냥감을 묵묵히 둘러앉아 뜯어먹었어. 이럴 때 아빠 호랑이는 위신 때문인지, 많이 먹고 싶은 본능 때문인지 식사 시간에는 더욱더 으르렁거렸어. 하지만 나는 그런 아빠 호랑이가 오히려 처량해 보였어.     

 엄마 호랑이에게 나는 어떤 의미였을까? 먹잇감밖에는 안 되는 새끼 토끼지만 이 굴의 명목상의 대장인 남편 호랑이가 애지중지하는 만큼 쉽게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겠지. 게다가 한동안 같이 지내다 보니 으르릉거리기만 하는 아들 녀석들이 못 가진 곰살맞은 구석도 보였을 테고. 배가 부르고 아빠 호랑이와도 사이가 좋을 때는 엄마 호랑이 눈에도 내가 귀엽게 보이기까지 한 것 같았어. 친구 호랑이에게 데리고 나가서 자랑하기도 했지. 꾀가 많고, 안마 솜씨가 좋고, 잔심부름과 굴 청소도 곧잘 한다고. 그리고 혀 짧은 목소리로 ‘묘마’(엄마)라고 부르는 것도 은근히 즐기는 것 같았어.    

 

 하지만 아무리 그래봐야 나는 이상한 호랑이, 아니 토끼였어. 아빠 호랑이가 사냥해오지 않거나, 자신을 매력 있는 암컷으로 보아주지 않는 날에는 모든 것이 내 탓인 양 무섭게 혼을 냈어. 쓸데없이 토끼 말을 공부한다고, 눈치 없이 행동한다고, 굴 안에서 깡충거린다고, 심지어는 피가 철철 나는 날고기를 맛있게 먹지 않는다고 혼을 냈어. 어깨가 결린다고 올라타서 전신을 주무르라고 명령하기도 했어. 나로서는 죽을힘을 다해 주물렀지만, 힘이 약하다고 또 혼이 났어. 토끼의 뒷다리 힘이 아무리 좋다지만, 그 큰 호랑이의 마음에 들 만큼 힘차게 주무르는 것은 무리였어. 엄마 호랑이는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서 분풀이하는 것 같았어. 그도 그럴 것이 아들 호랑이들은 어리기는 해도 호랑이는 호랑이잖아. 엄마 호랑이가 어흥하면 아들 호랑이들은 더 큰 소리로 어흥하고 포효해. 엄마 호랑이는 본능적으로 수컷의 힘을 알아. 호랑이 세계에서는 엄마고 아들이고 할 것 없이 몸집이 크고 더 크게 포효하는 호랑이가 우위에 서니까. 그러다 보니 엄마 호랑이의 심기가 불편할 때의 분풀이는 늘 내 몫이었어. 그럴 때면 나는 생각했지. “그냥 저를 잡아먹어 주세요.” 하고 말이야.          

 

 굴에는 아빠, 엄마 외에도 두 마리의 아들 호랑이가 있었어. 아직 어린 호랑이인데도 아들들은 아빠 다음으로 덩치도 크고, 포효 소리도 쩌렁쩌렁했어. 큰아들 호랑이는 굴에서 가장 기질이 강했어. 대담하고 머리 좋은 큰아들 호랑이를 무리의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지. 나는 속으로 큰아들 호랑이가 이 굴의 진짜 대장이라고 생각했어. 큰아들 호랑이는 기질은 강했지만, 아빠 호랑이를 닮아서 다정했어. 가끔은 산속의 이곳저곳을 데리고 가주었어. 큰 나뭇가지에 올려놓고 그네를 태워주면 엄마 호랑이의 구박도 잊어버릴 만큼 좋았어. 난 그런 큰아들 호랑이를 ‘묘오빠’(큰오빠)라고 부르며 따랐어. 산길에서 다리를 삔 내게 약초를 구해와서 입으로 잘게 씹어서 발라주며 한 시간 이상이나 문질러 주기도 했지.     


03. 호랑이 가족(그림 Elisha   https://brunch.co.kr/@babyhappy)

 큰오빠 호랑이는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는 듯했어. 자기 생각과 다를 때는 아빠, 엄마 가리지 않고 대들었어. 동생 호랑이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지. 동생 호랑이가 나를 괴롭히거나 하면 피가 날 만큼 물어주기도 했어. 그럴 때면 나는 안절부절못했어. 큰오빠 호랑이가 굴에 없을 때 작은아들 호랑이에게 앙갚음당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나는 근본적으로 평화를 사랑해. 아무리 내 편을 들어준다고 해도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것은 내게는 고문과 다름없었어. 엄마 호랑이 못지않게 큰오빠 호랑이도 공포의 대상이었거든.          


 작은아들 호랑이는 항상 볼이 부어 있었어. 사냥이 서툴고, 부모 호랑이 눈에 차지 않을 행동만 했어. 자연히 작은아들 호랑이는 무리 속에서 소외되고 외로워 보였어. 어떤 때는 토끼인 나보다 더 불쌍해 보여서 마음이 쓰였어. 자식보다도 토끼를 예뻐하는 가족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는지 나를 괴롭힐 때도 있었어. 그런 모습을 큰오빠 호랑이에게 들켜 흠씬 혼이 나고부터는 나를 무시하기로 작정한 것 같았어. 완전히 그림자 취급을 했어.

 작은아들 호랑이는 세상 모든 일에 흥미가 없어 보였고, 항상 뭔가에 화가 나 있는 듯했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종기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아슬아슬한 기분은 공포감만큼이나 싫었어. 말이 없고 반항적인 작은아들 호랑이를 그 드센 엄마 호랑이도 버거워했어. 하지만 말이야, 나는 굴에서 작은아들 호랑이가 제일 좋았어. 화가 쌓여있고 나를 그림자 취급을 하기도 했지만, 무심한 것 같아도 가장 마음 따뜻한 호랑이였어.     

 들판에서 산토끼 무리와 논 적이 있었어. 덩치 큰 수컷 토끼에게 뒷다리 공격을 받아 옆구리가 몹시 아픈 채로 굴로 돌아갔어. 토끼와 놀다가 다쳤다고 해보았자 혼만 날 것 같아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 끙끙거리는 나를 작은아들 호랑이가 보게 되었어. 화난 표정으로 어떻게 된 거냐고 짧게 물어보고는 내 대답을 듣기가 무섭게 바람처럼 뛰어나가 버렸어. 밤새워 그 수컷 토끼 녀석을 찾아내서 그 자리에서 잡아먹어 버린 작은아들 호랑이였어. 무심한 듯이 보였지만 조용히 나를 지켜주고 있었던 ‘묘묘빠’(작은오빠)가 진심으로 좋았어. 그리운 묘묘빠.     


 생각해 보면 호랑이 가족은 무섭기는 했지만, 각자 다른 모습으로 나를 지켜주고 사랑해 주었지. 하지만 나는 언제나 무섭고 불안했어. 천성이 사교적이고 명랑한 나였지만 굴에서는 한 번도 즐겁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억지로 애교를 부릴 때 말고는 진심으로 웃은 적이 없었어. 아빠 호랑이에게 혼이 나면서도 살짝살짝 들판으로 나가서 토끼들과 어울려 노는 것만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지. 커 가면서는 언젠가는 굴에서 탈출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하지만 모두가 사냥을 나가고 굴속이 텅 비어있을 때조차 난 도망칠 수 없었어. ‘어쩌면 세상 밖은 이 굴보다 더 무서울지 모르지.’라는 생각에 용기가 나지 않았던 거야. 하지만 이대로 불안에 떨며 호랑이 가족과 영원히 함께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어. 아무리 기다려도 얼룩무늬는 생기지 않았고, 이제쯤은 나도 내 존재를 인정해야 했어.     

 하루빨리 세상으로 나가서 나와 같은 하얀 털을 가진 토끼를 만나 알콩달콩 살아보고 싶어졌어. 용기를 내서 아빠 호랑이에게 말해 보았지.

“묘빠아(아빠), 저도 이제 굴을 나가서 제 짝을 찾고 싶어요.”

된통 혼이 날 각오로 이야기했지만, 아빠 호랑이는 실망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언제나처럼 포효하지 않았어. 아빠 호랑이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어.

“그래, 세상으로 나가보거라. 멋지고 상냥한 수컷 토끼를 만나 마음껏 사랑받고, 새끼도 많이 낳아 기르면서 행복하게 살거라.”

언제나 나를 지켜주고 예뻐해 주던 아빠 호랑이였어. 눈물을 글썽거리는 아빠 호랑이의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무섭고 지겨운 호랑이 굴을 벗어난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배은망덕한 나였어.

“묘빠아, 정말 고마웠어요.”라고 아빠 호랑이를 꼭 안아주고 어슬렁어슬렁 굴을 빠져나왔어. 이때만 해도 내 걸음걸이가 이상하다는 것을 전혀 몰랐지.

03. 호랑이 가족(그림 Elisha   https://brunch.co.kr/@baby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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