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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왕고래 Oct 27. 2020

"할아버지, 할머니 성함 아는 사람?"

내 새끼의 새끼를 바라보는 마음

국민학교 시절, 방학 때가 되면 동생과 나는 외가에 가 있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한참 동네 언덕을 헤집고 돌아와 보니 할아버지도 친구분들과 술 한잔 걸치신 뒤 그제야 들어오고 계셨다. 그러다 마루에 앉아서 우리를 보고 하시던 말씀이 떠오른다. 


"정희가 이놈들을 낳았어!"


얼른 들어가서 자라는 할머니의 구박에도 아랑곳 않고, 허공에 호탕하게 웃으시던 할아버지 모습이 떠오른다. 행여 식을까 가슴팍에 묻고 가져오신 붕어빵은 사실 꽤 눅눅했다. 그 바삭함을 잃어버린 붕어빵을 마루에서 나눠먹으며 동생과 나는 저 이야기를 수차례 들었다. 


"어이구~ 내 새끼들!"


이윽고 심하게 코를 골며 주무시던 장면까지 참 생생하기도 하다.




곧 할아버지 기일이다. 역시나 장녀인 어머니의 모습은 평상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달력을 바라보다 다가오는 그날을 인지하던 중 불현듯 옛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20년 전쯤, 고등학생일 때였나. 담임 선생님이 난 데 없이 이런 질문을 하셨다. 


"할아버지, 할머니 성함 아는 사람?"


친가/외가 모두를 포함한 질문이었는데, 놀라운 것은 반 아이들 누구도 정확히 네 분의 성함을 대지 못했다. 헷갈려하거나 일부만 기억하는 아이들이 대다수였고 아예 모르는 경우도 허다했던 것이다. 담임선생님은 조부모님들의 성함을 한자로 써오라는 숙제를 내주셨고, 그 덕분에 많은 아이들은 그제야 꽁꽁 숨어있던 이름을 먼지 쌓인 천막에서 걷어냈다. 


나는 부모님이 모두 직장을 다니셨기 때문에 외할머니와 지낸 시간이 많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 역시 단번에 떠올리지는 못한 것이다. 외가에서 보낸 추억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나는 당신들의 성함도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하다니! 정말 말 못 할 죄책감이 들었다.


이후 집으로 돌아온 나는 어머니, 아버지께 조부모님들의 성함을 다 여쭤보았고 이런저런 다른 질문도 함께 드렸다. 그러자 이내 어머니, 아버지의 이야기는 어렸을 적 할머니(그리고 할아버지)와 겪은 다양한 에피소드들로 이어졌다. 내가 우리 부모님과 추억이 가득한 만큼, 그들 역시 그들의 부모님과 참 다양한 추억이 존재했다.


문득 떠오른 옛 기억을 되짚으며, 직장 동료들에게 당시 담임 선생님의 질문을 그대로 해보았다.


"혹시 할아버지, 할머니 성함 다 기억하세요?"


익혀두었던 이름 석자들에 또다시 수십 년 간 먼지가 켜켜이 쌓였던 탓일까. 

마치 그때처럼, 미처 또렷하게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되었다. 




생각해보니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 그들의 발자취를 궁금해한 적이 있던가. 

돌이켜보면 나와 동생이 태어난 이후부터 조부모님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우리였다. 요즘도 할머니의 인생 최대 관심사는 우리 형제가 언제 가정을 꾸리느냐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하시는 말씀이다. 내가 다치거나 했을 때에 부모님 만큼이나 뒤에서 가슴을 쓸어내리던 모습을 종종 본다.


"정희가 이놈들을 낳았어!"라는 '사실' 하나를 되뇌며 크게 웃으시던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우리를 보고 뭐가 그렇게 좋으셨을까. 


술 냄새를 펄펄 풍기며 다가오시던, 조금 아플 정도로 볼을 꼬집거나, 세게 껴안으시던 그 모습이 아련하다.

'할아버지'가 아닌 어떤 이름 석자를 내가 곧 써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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