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왕고래 Nov 10. 2020

곧 이식될 장기를 짊어지고

생명을 이고 달리는 생애, 그것을 견뎌내는 사람들

2020년 11월 9일(월) 제주 발 김포 도착 저녁 비행기. 


업무 특성상 비행기를 탈 일이 잦은 나에게도, 자주 만날 수 없는 순간들이 가끔 있다. 공항 탑승구 앞쪽. 키가 작고 야리야리한 체구인 의사가 매우 경직된 모습으로 서 있다. 본인보다 훨~씬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든 채로, 그녀는 계속해서 뛰었다. 그 와중에 어딘가로부터 전화를 받는 등 매우 정신이 없어 보인다. 


수 겹의 테이프로 밀봉된 아이스박스.

겉면에는 '장기이식' 네 글자가 적혀있었다.



서울에 도착해서도 시간에 쫓기는 일정이었다. 맨 앞열을 예매한 뒤 탑승 전 대기열에서도 빠르게 줄을 섰다. 그런데 내 앞으로 냉큼 다가와, 라인 가장 앞줄을 단번에 차지해버린 사람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날씨가 영하권으로 떨어져 한겨울 복장이 익숙해진 요즘. 두터운 외투 차림새에 화장기가 전혀 없던 그 조바심 가득한 얼굴은 땀이 한 범벅이었다. 


탑승을 하고 보니 그녀는 내 뒤쪽에 자리를 겨우 잡은 듯했다. 시종일관 두 눈을 박스로만 향한 채 여전히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실 애당초 비행기를 가장 먼저 탑승하려고 줄 섰던 이유가 있다. 막간을 이용해서라도 잠시 잠을 청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별안간 나까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조바심이 난다. 처음 만난 생명의 연결고리, 그리고 그것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책임자의 모습을 만났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11월 9일 저녁 무렵의 대한항공 비행기는 출발이 50분가량이나 지연됐다. 지게꾼 그녀의 얼굴은 그럴수록 사색이 되어갔다. 전화 통화도 계속 늘어나는 듯했다. 나 역시 피곤함을 미처 느끼지 못한 채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며 그 모습을 찾았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행여 무슨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올까 싶은 마음에 불안한 가슴으로 '준비태세'를 갖췄던 것이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 유난히 시야를 가리던 구름들이 수천 개의 '과속방지턱'처럼 보였다. 유독 덜컹거리게 느껴지던 하늘 위 주행을 마치고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했다. 우리는 출구에서 제법 떨어진 게이트였다. 내려보니 다른 앞쪽 게이트에서 내린 수많은 승객들이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항공사 직원이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지나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지나가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체 무엇이 죄송한 일인가, 참 마음이 어렵지만 그는 수십, 수백 번을 저렇게 외치며 앞으로 달려갔다. 그 직원이 길을 터주면, 아이스박스를 짊어진 의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열심히 인파 사이로 뛰었다. 한 손에 전화기를 든 채로. 


점점 시야에서 그 모습들이 사라져 갔다. 

항공사 직원의 외침도 점차 목소리가 옅어졌다. 


내가 출구 쪽으로 다다랐을 때 이미 그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걱정은 끊임없이 쏟아진다. 퇴근 시간과 간간히 겹쳐있는 지금, 저들은 병원까지 잘 갈 수 있을까? 어떻게 가고 있을까? 먼 비행기를 타고 온 생명의 열쇠, 무사히 누군가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할 수 있을까? 


이제 더 이상 '준비태세'를 갖추지 않아도 되었다. 

그럼에도 간절한 바람은 계속됐다.


누군가 스스로 '희망'해서, 본인을 '희생'해 전달하고자 했던, 그 '선물'이 잘 전달되었기를.

예기치 못한 '선물'을 받은 그분은, 정말 '선물'같은 삶을 사시길.

수많은 짐을 짊어지고 땀범벅이 된 채 뛰던 의사, 그녀의 오늘 밤은 부디 편안했기를. 













이전 03화 명절, 스타벅스에 들어간 청각장애인 어머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