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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용 Sep 03. 2021

나 가출할래

아빠가 육아를 하면서 엄마가 제일 부러울 때

  “나 가출할래.”

 두 아이와 함께한 첫 번째 내 생일의 다음 날 아침이었다. 밤새 곱씹은 말을 아내에게 던졌다.






 이 말은 우리 부부 사이에는 종종 쓰이는 말로 ‘나 지금 잠시 휴식이 필요하니 혼자 길게 나갔다 올게' 정도의 의미다. 보통 정신적으로 굉장히 지친 상황에 나온다. 물론 그 안에 원래 가출의 의미인 '난 오늘 조금 삐뚤어지겠어!!' 도 담겨있다. 보통은 아내가 자주 쓰는 말이지만 이 날은 내 차례였다. 내가 둘째를 데리고 자느라 몇 주 동안이나 제대로 잠을 못 자고 예민한 걸 알아서인지 아내도 짧게 잘 다녀오라는 대답만 건넸다.


 난 이때 거의 번아웃 상태였다. 둘째 밤 수유를 하느라 계속 제대로 못 잔 데다 그 근래 3일 정도는 아기가 예방주사를 맞아서 인지 밤에 계속 보채는 바람에 하루에 채 4시간도 자지 못 했다. 그리고 하는 일들도 자잘한 문제가 많아 낮에도 정신없이 보냈다. 정신적으로 조금 피폐해진 와중에 체력도 바닥을 쳤다. 그런 와중에 생일이라고 가족들이 나름 일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아마 거기서 뭔가 터져버린 것 같다.

 ‘생일은 날 위한 날이라며…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그냥 쉬게 좀 둬. 아니면 그냥 평소처럼 지나가 주라!!’

 속으로는 생각했지만 이미 아빠 생일이라고 이것저것 준비하는 첫째 딸과 가족들 앞에서 다 그만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날 위한다면서 정작 무엇 하나 내 맘대로 못 하는 모순된 생일에 갑자기 확 지쳐버렸다.

 평소 같았으면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머릿속에 달라붙은 잡생각을 흘려보낼 텐데, 이 날은 몸을 아무리 써도 기분이 좋아질 것 같지 않았다. 몸에 힘도 없었다. 내가 애를 낳은 것도 아닌데 산후 우울증이 온건가… 자주 있지도 않은 이런 날이면 늘 그렇듯 그냥 어딘가 툭 터 놓고 이야기할만한 곳이 꽤 간절하다.


  어린이 집 학부모들이 모여있는 놀이터든, 아니면 조리원 동기들이   없이 알림을 울려대는 단톡이든.

 그런데 난 이런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다.


 난 첫째가 태어났을 때부터 집에서 애를 보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아내의 조리원 동기들 중 몇몇과는 안면이 꽤 있다. 그리고 어린이집 등 하원도 시키다 보니 어린이집 친구의 어머님들과도 자주 마주치는 편인다. 하지만 아내가 없이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은 거의 없다.  아내 없이 엄마들 사이에 있는 건 외국인들의 파티에 초대가 된 한국인이 된 기분이다. 누군가 내 팔을 끌고 가서 이야기를 붙여주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인사를 나누는 것조차 굉장히 어렵다. 물론 한번 시작하면 신나게 떠들어대겠지만...


 그럼 이미 아빠가 된 친구들은 어떤가. 친구들과 육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확실히 한계에 금방 마주친다.   내 주변 아빠들은 모두 경제활동에 많은 시간을 쓴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육아를 한다는 건 직장 생활을 마치고 남는 시간에 하는 어떤 특별한 일과에 해당하지 생활 그 자체는 아니었다. 적어도 내 주위에서는 그랬다. 그런 친구들과는 경제적인 부분이나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생기는 문제는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 광의의 육아 속 고충을 이야기 하기는 어렵다. 그들에게 육아는 마치 단거리 달리기 같다. 어떻게 얼마나 놀아주고, 무엇을 가르칠 지의 영역이며, 그마저도 퇴근 시간 이후나 주말에 한정되어 있다. 아이들이 잠들지 않아도 선택적 육퇴를 할 수 있는 아빠들은 내가 사는 마라톤과 같은 육아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내가 가출하고 싶다고 하면 그냥 나가면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할걸….


  몇 번 이런 경험을 하고 난 후 정신이 바닥을 칠 때 불쑥 느끼는 이러한 외로움 꽤나 뼈에 사무친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집 안에서 피어난 외로움이기에 사이에서 아무리 살을 비빈다고 해서 사라질 리가 없다. 이때만큼은 바로 옆에 가족들도 해답이 될 수 없다는 게 다른 문제들에 비해서 더 쓰라렸다.


 그럴 때면 나와 비슷한 상황일 때 수다를 떨며 공감받고 털어버릴 수 있는 엄마들이 부러웠다.


 어찌 보면 내가 어설프게나마 육아 관련 글을 쓰는 이유도 거기 있는지 모른다. 현실에서는 툭 터놓고 이야기할 상대가 없으니 인터넷이나 sns 어딘가에 이렇게 던져 놓으면 누군가 와서 읽고 공감해주지 않을까 하는 느낌. 그리고 최근에는 육아에 많이 참여하는 아빠들의 모임도 열심히 찾고 있다. 이러다 보면 언젠가는 현실 속에서도 나도 아침에 아이 등원시키고 커피 한잔 하면서 시시콜콜한 아기의 대소사를 이야기하는 육아 동지를 만날 수 있겠지.


 지금 글을 읽으시는 분 중에 저와 같은 동지를 찾고 있으시다면 언제든 어떻게든 말해주세요.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그래서 가출하고 어디 갔냐면.


차 타고 오래간만에 티니 핑과 쥬쥬 노래가 아닌 브루노 마스와 실크 소닉을 노래를 틀었다. 그리고는 스타벅스 드라이빙 스루에 들러 그란데 사이즈의 콜드 브루를 한 잔 샀다. 카페에 앉아서 마실 수도 있었지만 아이들 등원시키고 삼삼오오 모여있는 엄마들을 보면 샘이 날 것 같았다. 그 길로 종종 가는 공원 근처 갓길에 차를 세우고 공원 한 바퀴 산책했다. 그리고 차로 와서 에어컨과 노래를 세게 틀고 운전석 시트는 최대한 뒤로 눕힌 후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수 고양이를 조금 읽다가 브런치와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을 훑었다. 적당히 근사한 시간이었다. 뒷자리에 있는 아기 카시트가 운전석 시트가 더 눕는 걸 방해하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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